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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내 한 몸의 역사 / 유만주

부흐고비 2008. 7. 28. 08:46

 

내 한 몸의 역사


날마다 기록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는 날이 없어서, 내 한 몸에 모여드는 일이 그치는 때가 없다. 따라서 일은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다.

이 일이라는 것은 가까우면 자세하고, 조금 멀어지면 헛갈리고,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매일 그것을 기록한다면 가까운 것은 더욱 상세하고, 조금 먼 일은 헛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이라 해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기록해 놓으면 따라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기록 덕분에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글을 배운 이후로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나는 3,700날 남짓을 거쳐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보면, 꿈속에서는 또렷하던 일이 깨고 나면 흐리멍텅하여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여 돌아보면 빛이 사라진 것과도 같다. 이것은 날마다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수명이란 하늘에 달려있어 늘이고 줄이는 것은 결단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반면에 일이란 내 몸에 달려 있어 자세하게 쓰느냐 간략하게 쓰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내 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올해부터 날마다 하는 일을 기록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 날 그 날의 일을 날짜에 맞춰 쓰고,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 한 해가 될 것이다. 요컨대,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거르지 않으려 한다.

삼가 세월의 흐름을 기록하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며, 보고 들은 일을 기술하고, 서사(書史)를 고르게 평할 것이다. 집안일에서부터 조정의 일까지 다루되 삼정승이 임명되고 면직되면 그 사실을 기록하고, 관리의 성적을 매겨서 임용되거나 물러나면 그 사실을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갖추어 쓰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집안일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하늘이 나타내는 재앙을 살펴서, 번갈아 드는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고, 물난리와 가뭄이 들거나 바람 불고 우레가 치면 기록하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기록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일기는 인간의 일을 자세하게 쓰기 때문이다. 일기의 조목과 범례는 이런 정도에 불과하다.

시헌력(時憲曆)¹ 에서 날짜와 간지만 뽑아 새로 큰 책을 하나 만들어 사실을 기록한다. 가까운 일은 자세하게 알고, 오래된 일은 헛갈리지 아니하며, 멀어진 일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니, 뒷날 옛일을 점검하여 열람할 때 대비하고자 한다.

현재와 현격하게 멀리 떨어진 까마득한 상고 시절 가운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절보다 더 오래된 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일에 대해 억지로 끌어다 붙이거나 지나치게 파고들어 그 시대와 관련된 발자취를 갖추어 놓고자 애쓰면서도, 제 한 몸에 이르러서는 절실히 구하는 것이 그만 못하거나 도리어 간혹 소홀히 하여, 일이 일어난 날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미혹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기의 큰 경개를 서술하여 일기의 앞머리에 둔다. 때는 지금 임금님 51년이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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