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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법장스님

부흐고비 2008. 8. 16. 11:57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我有一鉢囊 유아일발랑)
 입도 없고 밑도 없다          (無口亦無底 무구역무저)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受受而不濫 수수이불람)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出出而不空 출출이불공)"

 

✸ 불기2549(서기 2005)년 9월 11일(음8월 8일) 입적하시기 전 시자 진광스님 요청에 따라 평소 대중 법문 때 신도들에게 즐겨 말씀 했던 글을 시자 스님 노트 뒷장에 친필로 남겼다.


경허·만공 선사의 가르침

                                  법장스님(조계종 총무원장) 2004.3.21.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  춘광무처불개화(春光無處不開花)
방인약문성우사(傍人若問惺牛事)  석녀심중겁외가로다(石女心中劫外歌)

화창한 봄날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겨울 얼어붙은 날씨가 풀리듯 마음의 번민과 고민, 짜증, 슬프고 괴로운 일 모두 법당에 풀어놓고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나는 삶, 자유스러운 삶을 사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법문을 하기 전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선원장 초청 법회가 아니라 조계사 초하루 법회에 참석한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전국에 계신 선원장 스님들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읊은 게송은 경허 스님이 읊은 시로, ‘세상과 다뭇 청산이 어느 것이 옳은가? 봄빛 있으니 꽃피지 않는 곳이 없어라. 만일 어떤 사람이 경허의 가풍을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 밖의 노래라 하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참고해야 할 것은 ‘돌계집 밖에 노래’ 이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한다면 이 법회와 더불어 선원장 스님들의 법문을 듣는 참뜻을 알게 됩니다. 불법은 삼계에 항상 있고 없지 않건만 있다고 드러낼 것 없이 여여(如如)하게 있는 것입니다.

불법이 쇠해서 어려운 시절 경허, 만공 선사께서 혜성처럼 나타나 근역선림(槿域禪林)을 중흥케 하고 불법을 크게 떨쳤으니 이분들이 석가세존과 다르지 않고 가섭존자와 다르지 않고 달마대사와 혜가대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자의 굴속에 다른 짐승이 살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한국 근대 불교사에 이 두 스님의 존재는 매우 큽니다. 조계문손 중에 이분들의 덕화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삶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은 바로 그분들의 밝은 덕화를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실로 한국 불교의 종정을 지낸 경허, 만공 스님이야말로 무소유의 가풍을 선양하신 분들입니다. 격렬한 조사선 가풍과 표리일체의 가풍을 선양하고 걸림 없는 무애의 삶으로 일관하신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선원장 초청법회 또한 제2의 경허와 만공을 길러내는 선불장이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법문을 들을 때는 엷은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하라”하였으니 이 말은 바로 눈으로 다른 경계에 대해 관여치 말고 잘 생겼다느니 말을 잘 한다느니 옳으니 그르니 법문이 어려우니 쉬우니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한 조각 밝음의 진실한 신심으로써 법문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불법은 입을 열기 전에 그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만 움직여도 곧 어긋나는 것이어서 개구즉착(開口卽錯), 동념즉괴(動念卽乖)라 하였으니 종일 설할지라도 근본에 있어서는 모두 다 마군의 업인 것입니다. 분별심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말 이전에 부처님의 참뜻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49년을 설하시고 나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어가며 인생의 진실한 삶을 49년 동안 설하셨습니다. 길 위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설법을 했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공자께서도 “나는 다만 말이 없고자 한다”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여러분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고양이가 쥐를 잡듯 일념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부탁드립니다. <허공장경>에도 “명상(名相)도 마업(魔業)이요 문자도 마업이며 부처님의 말씀에 이를지라도 마업이니라”하셨습니다. 앙산 선사께서 “<열반경> 40경도 모두 마설이다”고 하신 까닭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팔만사천의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제 신심과 원력으로 경허, 만공 선사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듣고 내가 가진 마음을 뒤집어 생사의 문제를 풀고 아무 걸림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경허 스님은 일찍이 아버님을 잃고 형은 입산하여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 스님을 은사로 밥하고 빨래를 하던 중 한 유학자로부터 유학에 통달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은사인 계허 스님이 환속하게 되자 경허 스님에게 계룡산 동학사 만화 스님을 찾아가라 이르셨습니다. 경허 스님은 그곳에서 경전을 탐독해 불경을 남에게 가르치는 강백이 됐습니다. 만화 스님은 200여 명의 대중 앞에서 “오늘부터 그동안 내가 해오던 강의를 경허에게 전한다. 가르침을 잘 받들어 행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수년 동안 강의를 하던 중 경허 스님은 문득 환속한 은사 계허 스님이 뵙고 싶어 찾아가던 길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천안지역을 지나게 됐습니다. 그때 스님은 인생무상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동안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은 생사에 허덕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고 다시 동학사에 와서 모든 대중에게 “그동안 내가 설한 소리는 모두 허튼소리다. 대중들은 모두 자신의 근기와 인연엔 따라 찾아가라”고 말한 뒤 문을 닫고 앉아 정진했습니다.

‘여사미래(驢事未來) 마사도래(馬事到來)’, 즉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공안을 참구하며 밥과 물을 먹지 않고 심지어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뾰족한 송곳을 턱 밑에 두고 깜빡 잠이 들면 거기에 찔려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하던 어느 날 한 사미가 올라와 “스님 마을에 내려가니 어느 거사가 ‘고삐 달 구멍이 없는 소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하는 그 소리를 듣고 확연대오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도송을 읊으니, ‘사고무인(四顧無人)이니 의발수전(衣鉢誰傳)이리오. 의발수전이니 사고무인이로다’.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네.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오.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네. 인도의 간디도 한 대낮에 사거리에서 등불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자 제자들이 ‘대낮에 무엇 하십니까’하고 물으니 ‘사람을 찾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한 경허 스님을 다시 해부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경허 스님이 학문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인물이 못생긴 것도 아니고 주위에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 의미가 누가 가슴을 치는 것처럼 다가설 수 있어야 진실한 신심과 원력, 자기 삶에 걸림이 없이 살 수 있는 발심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허 스님은 다시 걸망을 지고 주장자를 짚고 서산 천장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당시 형님이신 태허 스님이 주지로 계셨고 어머니가 공양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사미가 주지 스님에게 “스님 때 꺼리가 없습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허 스님이 직접 탁발을 나갔습니다. 국가가 스님들의 논밭을 일체 다 빼앗아 가고 스님네들은 사대문 안 출입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스님이 어느 집에서 목탁을 두드리자 주인이 나왔습니다. 주인은 경허 스님의 모습을 보자 중인지 속인인지 몰라 “거렁뱅이요 중이요”하고 묻자 스님은 “탁발을 나왔으니 거렁뱅이요, 절집에서 나왔으니 중이 분명하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내가 시주를 하면 그 대가로 나에게 어떤 공덕이 돌아옵니까”하고 묻자 스님은 “대가를 바라고 시주한 공덕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이 다시 “대가가 없다면 누가 시주를 하겠습니까. 썩 물러가십시오”라고 하자 경허 스님은 “시주를 못 받을망정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돌아서 왔습니다. 그렇게 다른 집도 찾아갔지만 변변치 못한 시주를 받고 다시 천장사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렵 이 진사라는 선비가 쌀 한 가마니를 일꾼에게 짊어지게 하고 찾아왔습니다. 아침에 찾아갔던 집 주인이 바로 서산지역에서 유명한 원님이자 유학자였던 것입니다. 이 진사는 경허 스님의 범상치 않은 품격과 언동을 보고 그 학문의 깊이와 덕의 경중을 알아보고 싶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에 스님은 “그래 그렇다며 저울과 잣대는 가지고 왔느냐”고 묻자 이 진사가 “그것은 저울과 잣대로 재보지 않고도 머리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경허 스님이 ‘악(喝)’하며 고함을 벽력같이 치고 “방금 내가 지른 소리는 몇 근이나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이 진사는 그 자리에서 깊이 사죄하고 단 하루 만에 경허 스님과 십년지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글이 아니고 말이 아닌 선의 가풍입니다. 여러분은 경허 스님이 이 진사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 소리 지른 것을 참구해야 합니다. 일갈(一喝)에는 우주의 만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사가 다 그 속에 있고 극락과 지옥, 옳고 그르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일체 만법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스님이 말한 ‘공덕이 없다’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소동파가 학문과 문장에는 뛰어났지만 스님들이 시주밥을 먹고 참선한다고 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깨우쳐 주기 위해 들어갔다가 큰스님의 할 소리를 듣고는 눈이 캄캄해지고 분별심이 끊어졌습니다. 소동파는 이때 문득 깨달아 게송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제 큰 소리를 한 번 듣고 깨우치고 나니 계곡물 소리가 부처님 말씀 아닌 게 없다. 어느 스님은 큰 소리 한 번 질러 8만4천 법문을 깨우쳐주었는데, 나는 뒷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할 것인가.”

바로 이런 경허 스님의 일화는 석가세존이 생사를 초월한 그 일이나 달마가 생사를 초월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장이나 말을 떠나 일체 중생에게 가르침을 전한 것입니다. 이렇듯 분별심이 끊어질 때 진실한 불교를 알 수 있고 참선하는 진실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글과 말로 알려고 하지 말고 사량이나 분별심을 놓아야 합니다. 남의 지식을 저울과 잣대로 재려는 이런 생각이 끊어질 때 진실한 불교를 알 수 있고 참선하는 진실한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공 스님에 관한 일화는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그 뜻을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다만 진실은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일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일제 36년 치하에서 살았습니다. 그 중 만공 스님이 일본인 미나미 총독을 꾸짖은 일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스님께서 마곡사 주지로 계실 때 미나미 총독이 31본산 주지 스님을 모시고 회의를 했습니다. 미나미 총독이 “한국 불교는 일본에서 온 것이다. 일본 불교와 조선의 불교를 합병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데라우치 총독의 힘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만공 스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청정본연(淸淨本然)이거늘 운하홀생산하대지(云何忽生山何大地). 청정히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기가 나왔는고”라고 크게 일갈을 내지르시고는 “전 총독 데라우치는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으로 마땅히 지금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서울 안국동에 있던 선학원으로 돌아온 만공 스님에게 만해 한용운 스님이 “스님, 크게 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미나미의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장자로 머리통을 한 번 때려주고 올 것이지 그러셨습니까”라고 말하자 만공 스님은 “차나 한 잔 드시게, 이 좀스런 사람아. 어리석은 개는 돌을 던지면 돌멩이를 물지만 영리한 개는 돌을 던지는 손등을 무는 법이라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말과 글이 아니요 사무치는 일갈로 유생을 대한 경허 스님이나 칼과 총이 난무하던 일체 치하에서 총독에게 일갈할 수 있었던 만공 스님의 안목이 곧 생사가 없는 이치입니다. 이것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고 가는 것,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모두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생사가 없는 것이요, 저울질 잣대질 하는 마음은 생사윤회를 거듭할 뿐입니다.

<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으며 마음 밖에는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核)이자 맥(脈)입니다. 그것을 되찾는 계기가 될 때 여러분의 시주 공덕은 무한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공덕만 바라는 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디 밤에 길을 가다보면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걱정이 생기지요? 하지만 고부지간에 싸움이라도 하고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디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기겠습니까?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 부처가 되고 싶다면 모든 생각을 전부 놓아버리고 이 자리에서부터 욕심내고 시비하고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생각을 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놓지 않으면 평생 병신노릇을 하고 살 것이라 단언합니다. (주먹을 쥐어 들어 보이며)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이걸 펴지 않으면 병신입니다. 주먹이 펴지지 않으면 병신노릇 밖에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먹을 펴 보이며) 손을 이렇게 펴가지고 오므려지지 않으면 그것 또한 병신입니다.

이 손안에 모든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 컵을 들며) 물을 마실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합니다. (컵을 내려놓으며) 이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모두 저에게 주시고, 대신 ‘만족’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고민을 가지고 있다면 집에 아무리 금은보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은 무간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 마음자리를 깨닫는 자리가 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리=현대불교신문 여수령 기자

출처:www.hannamu.com/wwwsvc/namubrd.read?p_cafeid=1010&p_boardid=1&p_itemid=130073&p_c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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