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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이 써서 주신 효경


어렸을 적에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그 때 외숙(外叔) 죽하공(竹下公)께서는 글씨에 힘을 기울이면서 덕을 닦고 계셨는데 특히 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셨다.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분가(分家)하여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외할머니를 살피러 오셨다. 얼굴에는 기쁜 빛을 띠고 상냥한 말씨를 써서 외할머니가 웃고 즐기시기에 보탬이 될 만한 기이하고 재미있는 바깥 세상일을 얻어 와서 하나하나 말씀을 해 올렸다. 외숙의 말씀을 듣고서는 온 집안이 일제히 왁자하게 웃음보가 터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어리석고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때라, 외숙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외숙은 내 팔을 끌어다가 글자를 가르쳐 주고 읽어보라 하고, 제법 읽을 때에는 “기이한 재주다.”라고 칭찬하셨다. 또 종이와 붓을 주면서 글자를 쓰게 하고, 제법 잘 쓸 때에는 “이 글씨는 우리 집안 글씨체다. 옛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 외손자 가운데 분명히 글씨를 잘 쓰는 아이가 있을 게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너인가 보구나!”라고 기뻐하셨다.

그 뒤 언젠가 외숙께서는 앞으로 오라고 나를 불러서 무릎을 꿇어앉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종이조각을 꺼내어 줄 듯하다가 다시 넣으시면서 “이것은 글을 짓는 도구이니, 이걸 얻으려면 절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내가 일어나서 절을 하자 그제야 웃으시면서 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서산(書算)이었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 혀를 만들고 그 혀를 열고 닫아서 책을 읽은 수효를 기록하는 물건이다. 이 서산은 외숙께서 직접 뚫어 만드신 것이었다. 나는 정말 기뻐서 그 날은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다음날 아침 외숙께서 내게 오셔서 “네가 몇 번이나 읽었는지 서산으로 세어 봤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외숙은 웃으시면서 “거짓으로 셈했구나!”라고 하셨다. 부끄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나는 곧 울음보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자 외숙께서는 나를 달래서 마음을 풀어주셨다.

모두가 어린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공부에 나아가도록 하려는 의도였지 장난하고 놀리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로 해서 외가에 한 해를 머물면서 문예를 조금 익혔고, 어른들께서는 어린 나이에 많이 성장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내가 친가로 돌아올 때 외숙께서는 《효경(孝經)》 한 부(部)를 직접 쓰셔서 내게 주셨다. 외할아버지의 글씨체를 본받아서 글씨를 썼기에 글자가 제법 커서 분간하여 익히기가 수월하였다. 나는 책을 받아서 보물인 양 간직하고 때때로 붓에 먹물을 묻혀 그 글씨를 흉내 내어 익혔다. 글자와 줄 사이에 먹물 자국으로 더럽혀진 것은 내가 어릴 때 남겨놓은 흔적이다.

외숙은 친구분들과 시를 짓는 모임을 즐기셨는데 그 자리에 나는 많이 따라갔다. 언젠가 외숙께서 술이 불콰하실 때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내게 보내주셨다.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일과 경계삼아야 할 일을 말씀하신 시였다. 나는 그 시를 《효경》과 함께 보관해두었다.

아! 이제 나도 머리털이 듬성듬성해지고 문예는 보잘 것 없고, 학업은 이룬 것이 없다. 그리고 외숙의 가르침도 다시는 받을 길이 없다. 화로가나 등불 곁에서 어머니를 마주하고 앉아 외숙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에는 언제나 그저 눈자위에 눈물만을 흘릴 뿐이다.

올 가을에 처마 밑에서 햇볕을 받으며 책을 말렸다. 그러다가 외숙께서 쓰신 《효경》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저미도록 아파오며 지난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외숙께서는 몸 효도를 실천하심으로써 자식들이나 조카들을 이끌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부러 《효경》을 내게 주셔서 기예를 학문보다 앞세워서는 안 되고, 학문을 행실보다 앞세워서는 안 되며, 어떤 행실도 효도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거로구나!

아! 세상에는 외숙의 문장과 재능을 잘 아는 분들은 있지마는 이렇게 지고한 행실이 있음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옛일을 갖추어 쓰거니와, 그저 내 손을 붙잡아 가르쳐주신 데 감사하는 뜻만을 표현할 뿐이랴? 나를 아껴주신 분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서문(西門)의 슬픔1도 아울러 드러내고자 한다.

이형부(李馨溥,1791~?), 〈舅氏手書孝經序〉, 《溪墅稿》

  1. 자신을 아껴 주던 인물이 죽은 뒤 그를 향한 지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국 진(晉) 나라 양담(羊曇)이 서주(西州)의 성문을 지나면서 그를 아껴주었던 외숙 사안(謝安)을 생각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는 옛일에서 나온 고사이다. “양담은 태산(太山) 사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비이다. 그는 사안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사안이 죽은 뒤에는 해를 넘겨 음악을 하지 않았고, 서주(西州)로 통하는 길로는 가지를 않았다. 언젠가 술에 크게 취하여 길에서 부축을 받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서주의 성문에 이르렀다. 좌우에 있던 이들이 ‘여기가 서주의 성문입니다’라고 아뢰자 양담은 몹시 슬퍼하고 통곡하고서 떠났다.”(《진서(晉書)》〈사안전(謝安傳)〉)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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