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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사기 술잔 / 김득신

부흐고비 2008. 12. 9. 08:07

 

사기 술잔


아홉 해 전에 한 친구가 사기로 만든 작은 술잔 하나를 선물하였다. 나는 그 술잔을 사랑하고 아껴서 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술을 따라 마셨다.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 그 술잔을 가져가지 않고 고향집에 남겨두면서 깨뜨리지 말라고 맏아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그 뒤 맏아들이 찾아왔을 때 혹시라도 술잔을 깨뜨렸는지 물었더니 “벌써 깨졌는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아 깨뜨린 것이 틀림없다.

언젠가 관동(館洞)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반짝이고 깨끗한 사기 술잔이 눈에 뜨였다. 술에 취한 틈을 엿보다가 빼앗아 가지고 소매에 넣어 왔다. 집안사람에게 부탁하여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그 술잔에 따라 마시도록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계집종이 조심하지 않아서 또 깨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탄식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라 또 그런 술잔을 장만할 생각이었다.

이해 봄 다시 서울에 갔을 때 다른 계집종이 사기 술잔을 바쳤다. 예전에 깨진 술잔에 견주어 보니 몸집이 조금 컸다. 나는 몹시 애지중지하면서 또 깨질까 염려하여 계집종의 손에 닿지 않도록 하였다. 술을 따라 마실 때에는 내가 직접 따라 마셨고, 술을 마신 뒤에는 바로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지금껏 깨지지 않았으니 퍽이나 다행스럽다.

사기 술잔은 광주(廣州)에서 만든 것을 제일로 친다. 이 술잔도 광주에서 나온 것으로 그 생김새는 똑바르고 그 빛깔은 정결하여 정말이지 술을 마시는 사람에 딱 어울린다. 허나 사기 술잔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오래도록 온전하게 지니기가 어렵다. 오늘은 비록 온전하다고 해도 내일 깨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이번 달에는 비록 온전하다고 해도 다음 달에 깨지지 않을지는 역시나 알 수 없다.

유기(鍮器) 술잔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유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만 사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 내가 사기 술잔을 꼭 가지려 하는 동기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친구들을 내 집에 모이게 하여 이 술잔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힌 것은 이 술잔이 있어서다. 감히 아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김득신1(金得臣,1604~1684),〈사배설(沙杯說)〉,《백곡집(柏谷集)》

  1. 김득신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 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의 아들로서 천재형 문인이기보다는 노력형 문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점을 보여주듯이 나이 5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급제한 이후에도 큰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주로 창작에 몰두하며 삶을 영위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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