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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언어와 품격 / 김경수

부흐고비 2009. 3. 26. 08:24

 

언어와 품격


1.

사람살이에 언어가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언어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다. 이를 화자와 청자, 자극과 반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화자의 내용을 청자에게 전하는 것을 자극이라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반응이라고 한다. 이 반응은 대체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나타나는데 이 결과의 축적이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어떠한 대화도 계속하여 플러스로만 또는 마이너스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 때 국가 지도자의 언어 표현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다변이 문제가 되고 언어의 품격이 문제가 되었다. 지도자는 한 사회나, 한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언어와 행동에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 지도자의 입에서 범인의 말투가 나오거나 저질적인 모습을 보이면 다수의 언중이 실망하게 된다. 말에는 그 사람의 품격이 배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주저함 없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소학도 읽고, 대학도 읽어야 한다. 고전은 인성을 수양시키고 인간의 품격을 높여 준다. 인문학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2.
《자치통감》 첫 권에 위문후(魏文侯) 이야기가 나온다. 위문후는 부하들을 잘 다스리고 현자들을 잘 모시는 훌륭한 제후였다. 그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담소한 내용이 흥미롭다. 당시에 중산이라는 지방이 있었다. 이 땅을 악양이라는 신하를 시켜 정벌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자기의 아들을 봉(封)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를 두고 더러 뒷말이 있었던 듯싶다. 그래 좌우 신하와 환담하면서 자신이 어떤 임금인가하고 물었다. 배석한 모두가 말하기를 “어진 임금입니다.” 라고 칭송의 대답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 때 유독 임좌(任座)라는 신하만이 중산에 아들을 봉한 일을 지적하면서 “어찌 어진 임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직언을 하였다. 당시의 관례로는 다른 지방을 정벌하면 아들이 아닌 동생을 봉해 주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그러자 위문후가 매우 불쾌해 했다. 예나 지금이나 바른 말은 쓰게 마련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임좌가 얼른 자리를 떴다.

위문후는 다시 옆에 있던 적황(翟璜)에게 내가 어떤 임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적황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어진 임금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조금 전 임좌는 내가 어질지 않다고 했는데 자네는 나를 어질다고 하니 어째서 그러냐?” 하고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적황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로부터 임금이 어질면 신하들이 정직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조금 전의 임좌의 말은 정직한 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임금님이 어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문후는 마음이 풀려 임좌를 다시 불러 직접 맞이하고 벼슬을 주어 예우했다.

이 짧은 대화에서 우리는 언어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적황의 명료한 표현이 임금도 높이고 동료도 구제한 것이다. 긴 말로 한 것이 아니다. 짧은 몇 마디로 정곡을 찔렀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또 적절한 대책도 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평론가가 남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각고의 수련이 필요하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려면 작품을 쓴 작가의 윗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을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맹자가 남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도 맹자와 대담하던 양혜왕이 맹자의 논리적 화법에 탄복하면서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나온 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대화의 달인인 맹자는 논리성과 비유성에서 추종하기 어려운 언어 능력을 지닌 분이다. 맹자의 이런 능력도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시, 서, 예, 악을 두루 섭렵한 결과다.

《논어》에는 공자의 언어에 대한 태도가 여러 곳에 걸쳐 나타나 있다. 공자는 성인이시다. 그런 공자께서 대화를 할 때는 상대에 따라 달리 하셨다고 한다. 고향 마을에 사시면서 촌로들과 교유하실 때에는 신실한 자세로 마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눌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더듬더듬 하셨다. 반면에 종묘나 조정에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사뭇 다르셨다. 말씀을 바르고 분명하게 하시었다. 다만 조심하고 삼가셨다 고 한다. 또 동료를 만나거나 아랫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실 때는 화락하게 하셨고, 서열이 높은 윗사람들과 담화하실 때는 중정한 모습으로 하셨다고 한다. 공자님께서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면 상대에 따라 다르게, 분위기에 따라 그에 알맞게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화법을 구사하신 것이다.

학고입관(學古入官)이란 말이 《서경》에 보인다. 옛 것을 배워 관직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옛 것이란 고래의 문물제도를 말한다. 고래로 전해오는 문물제도 속에는 인간이 지녀야 할 떳떳한 이치가 녹아 있다. 이 심오한 이치를 배운 후에 관직에 들어가야 한다. 나라의 일을 의논함에도 이 이치가 살아나야 모든 정사가 순조롭고 혼미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문물이 변한다 해도 바뀌지 않는 상수(常數)가 있다. 이 상수가 마음의 중심에 자리해야 한다. 이것이 떳떳한 항심(恒心)이다. 이 항심을 지니지도 않고 남의 윗자리에 나아가니 일마다 혼미하여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3.
대학에서 화법교육 강좌가 개설된 것이 6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이야 보편화되었지만 개설 당시로는 새로운 분야라 하여 상당한 흥미를 끌기도 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말하기는 네 가지의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설명화법, 묘사화법, 설득화법, 위안화법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의 화법 교육내용도 찬찬히 살펴보면 대상에 따라, 적재적소에 효과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모르는 내용을 알려 줄 때는 설명화법으로 하고, 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설득화법으로 변화시키며, 보이지 않는 사물을 알려 줄 때는 묘사화법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도 옛 성현들의 언어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수천 년 전에 성현들이 하신 내용을 지금에야 다시 들추고 있는 것이다.

4.

남명 선생에게 두 외손녀가 있었다. 이 둘에게 동강(東岡) 김우옹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가 장가를 들었다. 동강과 망우당은 남명이 마음에 담아 둔 든든한 제자였다. 이들이 장가들 때의 일이다. 동강과 망우당가에서 남명에게 외손녀가 어떤 규수이냐고 물었다. 이에 남명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대답했다. 남명의 말을 들은 두 집에서는 흡족하여 서둘러 혼사를 맺었다.

막상 혼인을 하고 보니 두 손녀가 성질이 매우 날카롭고,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가 별로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부부 간에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었다. 망우당이 어느 날 화가 나서 남명에게 항의하러 가는 참이었다. 도중에 동서인 동강을 만났다. 동강도 같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남명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한 스승의 말씀에 대하여 따져 들었다. 선생님께서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추천하지만 않았더라도 이처럼 어려운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반발했다. 그러자 시종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은 남명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는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질이 사납고 솜씨 없는 철부지를 군자가 아니고야 하루인들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들을 군자로 보고 권한 것이네. 내가 자네들을 군자로 보지 않았다면 권하기나 했겠는가?” 하였다. 두 사람은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언어에 담긴 함축미도 그러려니와 이에 대한 응용 또한 무한하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이런 언어 능력은 아무에게서나 나오지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깊은 사색이 필수적이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한국한자한문학회 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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