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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저자도의 기억 / 이경석

부흐고비 2009. 4. 11. 08:27

 

저자도의 기억


내가 한강 가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배를 끌고 물을 거슬러 가다가 저자도1의 모래밭에 정박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벗 권정칙(權正則)의 정자로 걸어 올라가니, 여러 객들이 나를 따랐다. 주인이 술을 권하고 정자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에게 기문을 지어달라는 것이 선친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술잔을 든 채 사방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정자는 강과 산 위에 있으니,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강 위의 시원한 바람과 산 속의 밝은 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이야말로 이 정자에서 평소 누리는 것이니,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좋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술 한 잔을 따라 들고 정자에 기대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 남쪽으로 높다랗게 뻗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울창창한 곳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다. 두 왕릉 너머로 헌릉(獻陵)이 바라다 보인다. 가파른 봉우리가 포개어져 봉황새가 춤을 추는 듯, 난새가 앉아 있는 듯한 곳이 바로 청계산이다. 곧장 동쪽으로 가면 남한산성이다. 파란 봉우리와 흰 성곽이 허공에 가로놓여 있다. 남한산성 동북쪽은 월계(月溪)와 도미진(渡迷津)이다. 고개와 협곡이 마주 솟아 있는데 풀과 나무가 울창하다. 그 앞에 푸른 섬이 있으니, 바로 저자도라는 곳이다.

물길이 둘로 나뉘어 흐르면서 섬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다. 기암괴석이 사이사이에 솟고 흰 모래가 평평하게 깔려 있다. 높은 벼랑의 갈라진 바위틈에는 꽃이 피어 있기도 하고 단풍나무가 서 있기도 하다. 봄이면 붉게 타오르고 가을이면 빨갛게 물드니, 그 광경이 더욱 기이하다. 그 가운데 몇 개의 촌락이 있어 소나무 숲 사이로 어리비친다. 그 위쪽은 광나루이다. 들판과 취락이 눈길 닿는 끝까지 아득히 뻗어 있다. 그 아래쪽에는 청담(淸潭)이 있다. 물이 맑고 질펀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정자 앞에 밤낮으로 펼쳐지는 경관은 이러하다. 희미한 이내와 지는 노을이 반짝였다 스러지면 만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봉우리가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는 듯하다. 여기에 하늘빛과 구름그림자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홀연 사라지는 가운데 어선과 상선이 홀로 떠 있거나 함께 지나가기도 한다. 사계절의 풍경이 무궁하여 이 정자의 흥취가 넉넉하다.

산은 겹겹으로 이곳에 모여들고, 물은 첩첩으로 이곳에 모여든다. 시원한 바람은 여기서 더욱 시원해지고 밝은 달은 여기서 더욱 밝아진다. 한 푼의 돈을 주고 살 필요도 없는 영원한 무진장(無盡藏)이다. 이 강가에 있는 집이 십여 채인데 유독 이 정자에서만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니, 이 정자에 풍월정이란 이름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나는 이로 인하여 느낀 바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바람이 바람이고 달이 달인 줄만 알지 내가 간직한 바람과 달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바람과 달은 밖에 있는데 내가 간직하였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답은 이러하다. 군자가 마음을 흰 눈처럼 맑게 하여 인욕이 깨끗이 사라지면 산뜻한 바람과 화창한 달빛을 나의 마음에 간직하게 되리니2, 밖에 있는 것이 필요 없다. 게다가 밖에 있는 바람과 달은 흐려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없고 밤낮을 가릴 것 없이 산뜻하지 않은 때가 없고 화창하지 않은 날이 없다. 굳이 정자에서 내려다 볼 것도 없이 끝없는 풍광을 저절로 지니게 되니, 그 즐거움은 언어로 형용하기 어렵다.

아, 밖에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안에 있는 것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게다가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권정칙은 흉금이 속되지 않고 훌륭한 자제를 두었기에 이 말을 해줄 만하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기문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이 말까지 함께 일러준다.

이경석(李景奭,1595-1671), 〈풍월정의 기문(風月亭記)〉,《백헌집(白軒集)》

 

 광진(廣津)_겸재 정선_간송미술관 소장

  1. 저자도는 뚝섬 앞쪽에 중랑천이 한강 본류와 만나는 지점에 토사가 퇴적하여 생긴 아름다운 섬이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잠실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조선시대 때 삼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뚝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늘 저자도를 보았기에 저자도의 풍광을 노래한 작품은 많다. 그 중에서 저자도의 풍광을 가장 운치 있게 묘사한 글이 바로 이경석의 글이다. 조선 후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산수의 병을 치유하고자 저자도에 집을 지었는데 그 상량문에 이런 글이 나온다. “섬 곁으로 휘도는 물결을 보면 석주(石洲) 권필이 배를 멈추던 일이 떠오르고, 꽃을 꺾어 물가에 서면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이 정인(情人)을 보내던 일이 생각난다. 옛정은 동으로 흐르는 물에도 다하지 않고 그 사람은 여전히 모래톱에 남아 있는 것만 같다(側島回波, 緬懷石洲之棹. 折花臨水, 渺思玉峰之送人, 故情不盡於東流, 伊人宛在於中沚).” 김창흡은 저자도에서 당대 최고의 시인 백광훈과 권필이 저자도를 배경으로 지은 시를 떠올리고 그로 인하여 정감이 끝이 없다 하였다. [본문으로]
  2.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매우 고상해서, 마치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빛[光風霽月]처럼 가슴속이 쇄락하기만 하다.”고 평한 내용이 나온다. 무숙은 주돈이의 자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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