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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18세기 종로의 풍경 / 김세희

부흐고비 2009. 4. 28. 08:50

 

18세기 종로1의 풍경


새벽종이 열두 번 울리면 점포의 자물쇠 여는 소리가 일제히 들린다. 그리고 장사하는 남녀들이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지팡이를 두드리면서 사방에서 요란하게 몰려든다. 좋은 자리를 다투어 가게를 열고 각자 물건을 펼쳐놓는다. 천하의 온갖 장인들이 만든 제품과 온 세상의 산과 강에서 나는 산물이 모두 모인다. 불러서 사려는 소리, 다투어 팔려는 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동전을 세는 소리, 부르고 답하고 웃고 욕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태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 같다. 이윽고 저녁 종이 울리면 그제야 거리가 조용해진다.

종로의 제품은 몇 가지 등급이 있다. 중국의 제품은 모두 당(唐)자를 붙이는데, 중국 제품은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고 담박하면서도 화려하며, 우아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기교적이면서도 법도가 있으므로 이 때문에 가장 뛰어난 상품으로 친다. 일본 상품은 정치하고 세밀하며 교묘하고 화려하여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 제품은 대개 조악하여 정교하지 못하다. 간혹 중국 제품을 모방하지만 진짜와 다르므로 등급이 가장 낮다.

이것이 어찌 산과 강에서 나는 재료가 중국과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사람의 솜씨가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우리 풍속이 지체를 구분하여 사람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지체가 높은 사람은 지식도 높고, 지체가 낮은 사람은 지식도 낮다. 그 정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체가 높은 사람은 의지할 데 없이 곤궁하여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태연하게 지식의 문을 닫아걸고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려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모두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 사람이 무식한데 어떻게 교묘한 솜씨를 부려 정밀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제품이 아름답지 못한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제품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종로의 제품과 산물은 나날이 가격이 폭등하여 몇 배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인가?

김세희2(金世禧, 1744∼1791),〈종가기(鐘街記)〉,《관아당유고(寬我堂遺稿)》

 

태평성시도 중 일부_작자 미상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종로는 예전에 종가(鐘街), 종루가(鐘樓街), 운종가(雲從街)라 하였다. 종로의 큰 길을 따라 등불을 걸어놓은 모습을 뜻하는 ‘종가관등(鐘街觀燈)’은 한양의 아름다운 열 가지 광경의 하나였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종로였다. [본문으로]
  2. 김세희는 역관으로 본관이 설성(雪城), 자가 사호(士浩)인데,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규장각에 저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1책 63장의 문집 《관아당유고(寬我堂遺稿)》가 그의 저술이다. 아들 김상순(金相淳)이 노년에 김세희의 남은 글을 수습하여 문집으로 엮은 것이다. 역관으로서 생생한 중국어를 익힐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였으며, 문학에도 관심이 높아 《고문초(古文抄)》, 《명문소품(明文小品)》, 《파아(葩雅)》 등을 엮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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