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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상국 시인

부흐고비 2010. 2. 23. 09:40

 

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해별곡><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이 있으며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수상등을 수상했다.

시인의 시는 선적인 깨달음의 세계와 인간적인 따뜻함이 동시에 배어난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 이상국 

자다 깨면/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 그는 곡식이든 짐승이든/ 늘 뭔가 심고 거두며 살았는데/ 나는 나무 한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 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어둠 / 이상국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휘영청이라는 말 /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탑 - 수타사터 논 속의 탑에게 / 이상국

한때는 절 받고/ 돈도 받았겠지/ 이름 있는 날이면/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아무개와 같이 살게 해달라고/ 숱한 사람들이 찾아와/ 원을 빌었겠지// 절이 가난했던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너무 많았던지/ 어느날 부처는 산을 내려가고/ 탑이 혼자 그 책임을 다 졌는데// 천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고/ 온몸을 거의 부수고 나서야 그는/ 겨우 논물에 비치는 제 몸속의 탑을/ 조용히 바라보는 거였다//

 

겨울 초월암에 갔다가 / 이상국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통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굴뚝 모퉁이에서 오줌을 누는데/ 살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늙은이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오봉리 버스 정류장을 지나간다/ 나도 오리처럼 푸른 목도리를 하고/ 남 다 살다 간 세상을 건너간다//

 

적멸(寂滅) / 이상국

남자 서넛이/ 개 한마리 끌고 강으로 나가네/ 소주 몇병 들고 강으로 나가네// 저녁이 되자/ 개 한마리 소주 몇병을/ 각기 배에 나눠가지고 돌아오네/ 노래하며 돌아오네// 어두워지는 강가에/ 그슬린 돌멩이만 남았네//

 

감자떡 / 이상국
하지가 지나면 /성한 감자는 장에 나가고 /다치고 못난 것들은 독에 들어가 /가을까지 몸을 썩혔다 /헌 옷 벗듯 껍질을 벗고 /물에 수십 번 육신을 씻고 나서야 /그들은 분보다 더 고운 가루가 되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흙의 영혼 같은 것인데 /강선리 늙은 형수님은 아직도/시어머니 제삿날 그걸로 떡을 쳐서 /우리를 먹이신다

있는 힘을 다해 / 이상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 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성묘 / 이상국
- 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 평이나 있고 아들자식들이 모두 이름 석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라도 하나 넣어드릴 걸

평생 어두운 집에서 사시던 분들

 

시로 밥을 먹다 / 이상국

철원 사는 정춘근 형에게/ 시 한 편을 보냈더니/ 원고료 대신이라며 쌀을 보내왔다/ 그깟 몇푼 된다고/ 온라인 한줄이면 충분할 텐데/ 자루에 넣고 다시 포장해서 택배로/ 이틀 만에 사람이 들고 왔다/ 철원평야 들바람과/ 농사꾼들 발자국 깊게 파인/ 논바닥이 훤히 보이고/ 두루미 울음까지 들어 있는/ 쌀을 보내왔다/ 나는 그걸로 식구들과 하얀 이밥을 해먹었다//


아침 시장 / 이상국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시고 나왔는지 장바닥 목 좋은 곳 깔고 앉으려고 일찍도 나온 할머니가 나생이와 쪽파 뿌리를 손주 머리 빗겨주듯 빗어 단을 묶는다. 각을 뜬지 얼마 안돼 아직 근육이 퍼들쩍거리는 돼지고기를 가득 싣고 가는 리어커를 피하며 출근길의 아가씨가 기겁을 하자 무슨 씹이 어떻다고 씨부렁거리는 리어커꾼의 털모자에서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아직 봄이 이른데 딸기 빛깔이 꼭 칠한 것처럼 곱다. 순대국밥집 앞의 시멘트바닥에 잘생긴 소머리 하나가 새벽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꿈꾸는 표정으로 면도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골목 안이 화안해지며 차 배달 갔다오는 미로다방 아가씨가 어묵가게 아저씨를 향하여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

그곳 / 이상국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를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 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 보고는 한다

똬리 다섯 개 / 이상국
배다리 솔밭 살던 장수 아버지 별명이 똬리 다섯 개, 아잇적부터 물건이 하도 커 거짓말 좀 보태면 홍두깨만해서 물동이 이는 똬리 다섯 개를 걸어도 끄떡없었다. 이게 수캐처럼 처녀 과부 안 가리고 밤낮 없이 껄떡거리는 바람에 사람 축에도 못 들고 몰매똥매 숱해 맞았다. 어느 해 봄 이웃집 닭에다 그 짓을 했다고 온 동네가 수군거리자 장수 할아버지 아예 뒈지라고 뒤란 도라무깡에 엎어놓고 집채만한 돌로 눌러놓았는데 밤이 되자 땅 파고 기어 나와 또 과붓집을 기웃거렸다는 장수 아버지, //올 봄 저 세상 가며 그 좋은 물건도 가지고 갔다.

자두 / 이상국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것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물에 혼은 실어 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본다

이농 / 이상국

우리는 농토 깊숙이 슬픔을 묻고 떠난다/ 탕개 틀린 땅 끝 집을 버리고/ 우리 사는 세상 우리(柵)를 부수고 떠난다/ 그렇게 힘센 아버지들이 아버지를 낳고/ 따뜻한 땅이 씨앗을 품었음에도/ 빈손 들고 간다/ 녹슨 펌프대 밑에 이 빠진 밥사발 내던지고/ 소리쳐 울며 간다/ 다시는 배고픈 땅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온다 해도 쟁기를 잡았던 손에/ 무기를 들고 올 것이다/ 우리는 간다/ 논두렁 밭두렁 베고 쓰러진 주검들 일어나/ 가라고 어여 가라고 소리치는 벌판/ 분노의 물꼬를 밟으며 우리는 간다

 

옥상의 가을 / 이상국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묻어있다/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무밭에서 / 이상국

무는 제 몸이 집이다/ 안방이고 변소다/ 저들이 울타리나 문패도 없이/ 흙속에 실오라기 같은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조금씩 생을 늘리는 동안/ 그래도 뭔가 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가다가/ 어느날 농부의 손에 뽑혀나갈 때/ 저들은 순순히 따라 나갔을까, 아니면/ 흙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을까/ 무밭을 지나다가/ 군데군데 솎여나간 자리를 보면/ 아직 그들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손을 넣어보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같은 여자가 끓여주 /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 공양 / 이상국

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 이천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을 받았다/ 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숫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 그러나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 것이다/ 오늘 밤에도 어딘가 가야하는 거리의 도반들이/ 더운 김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

 

한로 / 이상국

가을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진다// 한 보름 앓고 나서/ 마당가 물수국 보니/ 꽃잎들이 눈물자욱 같다// 날마다 자고 일어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아프니까 좋다/ 헐렁한 옷을 입고//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

 

성자 / 이상국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넣는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민박 / 이상국

울산바위 꼭대기에는/ 별들의 집이 있다// 어느 날/ 집 떠나/ 해 지고 어두 우면// 그곳에 가 자고 싶다

 

기러기 가족 / 이상국

- 아버지 송지호에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살구꽃 / 이상국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서문리 이장네 마당/ 짚가리에 기대어 피었습니다/ 지난겨울/ 발 시려운 새들 찾아와/ 앉았다 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피었습니다//

 

오래된 사랑 / 이상국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 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백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 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초파일 / 이상국

화암사 갔다가 등을 걸었습니다// 작은 등 내 이름 옆에/ 아내와 아이들 이름을 적었습니다// 등을 걸고 바라보니/ 부처님이 큰아버지처럼 보였습니다//

 

별 만드는 나무들 / 이상국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성자(聖者) / 이상국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넣는 것인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하늘의 집 / 이상국

전깃줄에 닿는다고/ 인부들이 느티나무를 베던 날/ 아파트가 있기 전부터 동네를 지키던 나무는/ 전기톱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쓰러졌다/ 옛날 사람들은 가지 하나를 꺾어도 미안하다고/ 나무 밑동에 돌멩이를 던져주었고/ 뒤란 밤나무를 베던 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흙으로 그 몸을 덮어주는 걸 보았는데/ 느티나무의 숨이 끊어지자 인부들은/ 그 커다란 몸을 생선처럼 토막내 싣고 갔다/ 이파리들의 그늘에 와 쉬어가던 무성한 여름과/ 동네 새들이 깃들이던 하늘의 집을/ 그렇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그곳 / 이상국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며칠씩 앓기도 한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 디딜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새를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보고는 한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이상국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끊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진부령 / 이상국

내 스무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 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 긴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눈물나던 영.//

 

산방일기(山房日記) / 이상국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 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 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다람쥐는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어느덧 저녁이 와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몸을 숨겼던 밤이 산적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 멀쩡한 집과 나무와 길을 어둠속에 처박는 산골, 외롭다고 풀벌레들이 목쉰 소리를 하면 나는 또 산 너머 세상의 의붓자식같은 내 인생을 생각하며 밤을 새고는 했다//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 이상국

거마리 고개 넘어 절집 가서/ 푸른 머리 새 한마리 보았습니다/ 숲이나 물가에서는 인기척만 나도/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물새 한 마리/ 말 많은 참새들 틈에서 밥 먹는 걸 보았습니다/ 아침저녁 공양 때마다/ 산속 어디선가 온다는데/ 스님들도 먹어야 부처를 모시고/ 깃털 같은 몸뚱이도/ 먹어야 사는 건 다 아는 일이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한 그가/ 밥 얻어먹으려고/ 절마당이나 기웃거리는 게 슬퍼서/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줄포에서 / 이상국

동해에서 조반을 먹고/ 줄포(茁浦)에 오니 아직 해가 남았다/ 나라라는 게 고작 이정도라면/ 나도 왕이나 한번 해볼 걸// 큰 영 하나만 넘어도/ 안 살아본 세상이 있고/ 해 질 때 눈물나는 바다가 있는데/ 나는 너무 동쪽에서만 살았구나/ 해마다 패독산(敗毒散) 몇첩으로 겨울을 넘기며/ 나 지금 너무 멀리 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래도 며칠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은 건/ 생의 어딘가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라고/ 여기가 아니라며 추운 날/ 기러기 같은 생애를 떠메고 날아온/ 부안 대숲 마을에서/ 되잖은 시 몇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 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리필 /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스크와 보낸 한 철 코로나19를 견디며 / 이상국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 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 철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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