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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마종하 시인이 세상을 뜬지 어느새 1주기가 되었다. 어디에도 마종하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느 시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져 주는 질문이 여기에 있다. 시인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유언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 자연으로나 빨리 보내주게"라고 해서 장례식도 가족장으로만 치뤘다는 후문이다.
필자에게 '마종하 시인'보다 '마종하 선생님'이라는 것이 익숙하다. 마종하 시인은 필자의 중학교 때 선생님이기도 하다. 마포중학교 때 어느 나른한 오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시를 한 줄 읽어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말했었다. '돌맹이'라는 소재를 주면서 다음 시간까지 시를 써오라는 숙제였다. 많은 학생들은 웅성거렸지만 그렇게 한 주가 지나버렸다. 숙제를 내라고 말씀하셨고, 자습을 시킨 후 많은 작품을 꼼꼼이 읽으셨는지 몇 작품을 읽어주시면서 조목조목 잘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 필자는 세상에 태어나서 글을 써서 처음 칭찬을 받았고 학교 교지에 발표할 기회를 얻었고, 나중에 문예 장학생으로 대학교를 다니던 계기가 되었다.
등교길 아이들의 발걸음이
의외로 느리다.
공원의 노인들 발걸음이
상당히 느리다.
아이들과 노인들은 공간에 살고
그 중간에 끼여 사는 자들은
공연히 바쁘게 뛰어다닌다.
쓸데없는 이유를
무성한 그림자로 거느리면서.
시간의 고무줄 위에서
아이들은 천지를 수직으로 날고
노인들은, 길 없는 길 위에서
빗자루로 시간을 지우고 있다.
-마종하 시인의 <그림자의 모습>
선생님이자 시인은 바쁜 중에도 느리게 사는 노인의 발걸음에 시선이 걸린다.
어릴 적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꿈은 키우는데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마종하 시인,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목소리가 성량이 큰 시인은 의외로 뛰어난 관찰력을 갖고 있었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어 마종하 선생님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마종하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전에 '마중물'이라는 말을 꺼내셨다. 누군가는 우물물을 넘치게 하려면 마중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일에 바쁘게 살기 쉬운 세상에 마중물의 역할이 마음에 오래 남는 말씀이었다. 이건청 시인은 마종하 선생님을 이렇게 평했다. "1960년대 한국시의 빛나는 부분이었으며, 세사에 초연하게 중후한 시편들을 써낸 진정한 시인 마종하는 가족들 품에서 외롭게 적멸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거든, 시를 읽은 것은 어떨까. 그 시인들이 바라본 시선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하영목 박사의 블로그에 걸려 있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떠난 후에라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기억된다면, 우린 떠난 것이 아니다."
상 따위를 받는다는 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제 일을 한 것인데
거짓 겸손으로 나서서 나대다니.
사양하거나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진정한 이름은 아니다.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스님이나 신부가 불쑥 나서서
상이나 받는다는 건 이상한 노릇.
그렇기에 나도 다 치우고
'스님도 시인도'아닌
'스치는 인간' '스인'이 된 것이다.
최소한의 위안으로 쓸 뿐인 시.
정명주의나 무명주의는 같은 것.
식자우환의 소동파나
'외눈박이 신사'를 그린 고흐도
어쩔 수 없이 동사무소에
등재된 이름일 뿐,
섞어 먹어 한 몸이 된
한 몸의 되풀이가 온 몸인 것을.
마종하의 <일러 이름-수상 사양 소감>
마종하 시인 약력
마종하(馬鍾河, 1943.12.25~2009.1.10), 강원 원주 출생, 원주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8년 동아일보<겨울행진>와 경향신문 <귀가>신춘문예에 함께 당선됨(이후 중복 투고 금지)
[현대시] 동인, [월간 스포츠] 편집원, 남산공업전문학교 교사, 마포중고 교사 역임, 2006년 36년간의 교직에서 정년퇴임, 1990~2008까지 다수의 모든 문학상 거부.
주요 저서 : 시집 <노래하는 바다> 민족문화사 1983, 시집 <파냄새 속에서> 나남 1988, 시집 <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 세계사 1995, 시집 <활주로가 있는 밤> 문학동네 2000, 장편소설 <하늘의 발자국> 창우사 1988
출처 : 라이팅 포럼 윤영돈
겁 / 마종하
비결은 '겁'이다./ 겁으로 산 것이다./ 빌어먹을 눈치보리라니./ 1·4후퇴 때 어머니께서/ 바가지를 쥐여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나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께선/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셨다./ 그때부터, 뿌리의 겁,/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 가난은 이제 친숙하다./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힘살만으로/ 저 널린 허무를 가꾸며,/ 마른 바가지와도 같이/ 겁마저 가볍게 꾸린다.//
겨울 행진(行進)/마종하 -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디를 가나 얼어붙은 의식(議識)의/ 빛나는 혼(魂)들은 있다./ 눈이 와서 흰 것뿐인 날,/ 까마귀의 긴긴 울음은/ 천길 누구렁에 빠져 있고/ 우리들은, 침구와 몇 날의 스푼뿐으로/ 겨울의 낯선 도시를 행군하였다./ 욕망의 군단을 이끌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유의 전리품,/ 그 차고 빛나는 사상(思想)은 무엇인가. /판 손을 비비고, 어깨를 펴고,/ 얼어붙은 목울대를 치며/ 우리는 한때, 찻집 '역마차'에서/ 우유빛 살들로 눈을 풀었다./ 벽에는 칸타빌레 흰 뼈의 눈이 내리고/ 우리는, 말려드는 의식의 끈을 풀었다./ 불꽃 너울거리는 스포오브의 연탄은/ 저마다 분노를, 저마다 살해를,/ 활달한 웃음을 피워 올리지만/ 유리 밖으론, 짐마차에 몸을 실은/ 채찍 든 아저씨가/ 덜그럭 덜그럭 맑은 공간을 후려치며 지나간다./ 아, 따가운 형동(衡動), 우리는 일어선다./ 밀폐된 유리의 문을 밀치고/ 우리는 빤질거리는 경험의/ 빙판의 길을 나선다./ 지나간 말들의 울음 뒤에/ 진정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저 무한천공(無限天空)의 까마득한 하늘에서/ 죽은 감탄사의 눈송이는 내린다./ 찢기우며, 허우적거리며/ 달려온 협곡(峽谷)의 바람은/ 시시로 울며울며 하늘로 피어 오르고/ 우리들의 최후, 목숨의 끝간 데를/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들, 그 숲한 시대의 뇌까림을/ 당신은 아시는가./ 무분별의 종점에서 우리는 횡단하였다./ 눈 속의 식품사정, 그리고 지폐의 죽은 단위를/ 한겨울에 묻으며, 우리는 횡단하였다./ 시간은 무거운 짐을 풀고/ 금빛 빛나는 속도를 지닌다./ 갈참나무 울울한 숲길에서/ 기진한 우리들의 잠, 꿈속에서도/ 우리는 타오르는 시대의 여기(餘氣)를 보았다./ 밤새워 불타는 그 많은 수공(手工)들의 종이탑(塔)./ 그러나 울며 고뇌하던 옛 소년시절,/ 그 살아나는 운문(韻文)의 맑은 가락들을/ 당신은 아시는가/ 나는, 소리없이 와 닿는 아름다운 변화,/ 저 획득의 기막힌 끈을 잡는다./ 잊은 장신구의 슬픔이듯/ 무의식의 매듭을 푸는 일은 즐겁고,/ 손거울에 새까만 두 눈알을 띄워 본다./ 푸른 공간과, 새로 돋는 시간의 살 속에/ 나의 치열(齒列)은 튼튼히 박혀 있고/ 갈참나무 울울한 숲길을 벗어나/ 우리는, 남 모르는 고뇌의 반짝이는 사랑으로/ 우울한 도시의 겨울을 휩쓴다./ 머리칼 하나에도 눈꽃은 빛나/ 한 손을 비비고, 어깨를 펴고,/ 얼어붙은 목울대를 치며/ 우리는 몇 번이고 출발한다./ 새벽에 사라진 말들의 뒤를 좇아/ 마치 아침에 죽은, 저 참혹한 시대의 사나이처럼.//
귀가 / 마종하 - 196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나부끼고 있었다./ 고단한 사나이의/ 머리칼은 일어서고/ 저렇게 많이 흔들리는 것들,/ 내가 빈 시간 속의/ 복도를 울리며 돌아왔을 때/ 넘쳐있는 휴지통과/ 중중 떠다니는 기호,/ 깃발로 변한 커튼을 보았다./ 하나의 핀에 꽃혀/ 파닥거리는 바람은/ 유리를 할퀴며 노래 부르고/ 저 바위의 이끼인 듯/ 시간은 어느새 말라붙어 있다./ 잃어버린 활기와/ 죽은 감탄시를 거느리고/ 나는 잠든다./ 잠 속에서도/ 날개 달린 파도는 밀려닥쳐/ 우리들의 빈곤,/ 우리들의 허욕,/ 그리고 굳어진 기억의 기슭을 무너뜨린다./ 맑게 씻긴 낮잠의 눈은 살아있다./ 후원 가득히 햇살은 내리고/ 내려서 까물까물 기어다닌다./ 그대는 아시는가./ 오래 드러나는 저 돌들의 웃음소리와/ 옛 기둥에 미끌어지는 광선./ 우리는 시시로/ 일그러지는 고전의 물결을,/ 시든 사랑을 보았다./ 어쩔까, 어쩔까,/ 트렁크 속에서/ 때묻은 견문록들은/ 아직도 모른다! 아직도 모른다!/ 소리치고 있다./ 나는 고요히 누워 있다./ 어둠 속에 주린 띠를 풀며/ 냇물은 흘러가고/ 울음 속에서/ 내 젊음의 치켜 솟는 언덕,/ 그러나 내갠 즐거운 소문이/ 아직 곧이 들리지 않는다./ 오래 잊었던 속도가/ 나를 경쾌하게 흔들 뿐,/ 웃음 속에 몸을 숨기는 일과/ 눈꼬리를 누르고/ 자기중심에 빠지느 자들./ 나는 고요히 누워 있다./ 빛의 촉수를 꾸부려서/ 접어둔 시간을 펴 보이듯/ 한알의 보약돌은/ 속에 쌓인 광선을/ 보여주고, 보여주고…./ 침상만큼 낮게 까마귀는 날은다./ 매어달린 잠든은/ 눈썹 끝에서/ 짧게짧게 쌓인다./ 풀끝에서 싹 트는 폭풍,/ 폭풍은 내 깊은 절망의 돌을 흔들고./ 드디어/ 밤하늘은 회복한다./ 다시 돌아오는 냇물과/ 다시 살아오는 수단,/ 아, 다시 시작되는 방법을./ 까마귀는 깜깜한 날개를 벌럭이며/ 사라져 가고/ 무적속에서,/ 아름다운 변화처럼/ 해는 떠 올랐다.//
안개의 개안 / 마종하
적십자병원에서 개안 수술을 받았다./ 눈에 늘 안개가 끼어 있는 백내장./ 흐리게 떠돌던 팔 다리 묶인 채, 혈안이 되어/ 인제 세상 더 볼 것 없다는 말인지./ 안개 속에서 아버지는 잠적했으며/ 안개 끝에서 어머니마저 잃었다./ 그리하여 나도 결국 안개가 되었으며/ 눈 시린 아내는 말할 것 없고/ 안개 낀 나를 따라, 두 딸과 한 아들도/ 안개 속에서 허망하고 뼈저린 삶./ 딸들에겐 선명한 안개꽃을,/ 아들에겐 안개 터는 날개를./ 안개의 자본주의를 헤집어나가야 한다./ 안개의 사회주의는 안개를 털어야 하는 것이다./ 개안의 의미를 나는 믿지 않으며,/ 개안의 의미를 나는 믿는다./ 백내장 수술 후 눈은 새로 열렸으며/ 나는 다시 이 지상을 보게 되었다./ 세상과 나는 변함없이 변하였으며,/ 새로 피는 안개꽃은 안개가 아니라는 것과/ 안개 걷은 집, 안개 터는 나무,/ 그들로 인하여 나도 다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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