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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莊周)와 나비, 그 너머에는


북한산을 붉게 수놓은 진달래도 지기 시작하고 이제 노란 개나리가 한창이다. 신록이 풀어놓는 연녹색 물감이 온 산에 번지고 새들은 가릉빈가(迦陵頻伽)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연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런데 장자(莊子)는 이 세상을 이대로 꿈이라 하였다. 정녕 꿈이라면 미추(美醜)도 시비(是非)도 변별할 필요가 없을 터, 그냥 이대로 꿈속에서 잠들어야 하는가. 저 곱게 핀 진달래와 개나리는 또 어찌 하란 말인가.

사물은 애초에 변별(辨別)이 없기도 하고 애초에 변별이 있기도 하니, 변별이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천하가 통틀어 한 물건이고, 변별이 있다는 측면으로 말하면 나의 몸조차 한 물건이 아니다.
천하가 통틀어 한 물건이고 보면 장주(莊周)와 나비, 나비와 장주에 어찌 변별이 있으리오. 나의 몸조차 한 물건이 아니고 보면 나비와 나비, 장주와 장주에 어찌 변별이 없으리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고 보면 나비가 애초에 나비가 아니었고,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고 보면 장주가 애초에 장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꿈속에 너울너울 날아다니던 나비가 장주가 아니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으며, 꿈에서 깬 장주가 나비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말한 꿈에서 깬 상태가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으며, 꿈속에 너울너울 날아다니던 때가 생시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적궤(弔詭)1라 하니, 그 뜻은 큰 성인인 황제(黃帝)도 잘 알지 못했고 비록 만세(萬世)의 뒤에 큰 성인이 출현할지라도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주는 그대로 장주라 하고 나비는 그대로 나비라 하느니만 못할 것이니, 이를 ‘인시(因是)2’라 하며 이를 ‘불변지변(不辨之辨 분변하지 않는 분변)’이라 한다. 불변지변은 오직 성인이라야 알 수 있다.
- 이행(李荇),〈장주호접변(莊周胡蝶辨)〉, 《용재집(容齋集)》

 

 장자와 나비

[해설]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시인인 이행(李荇 1478∼1534)의 글이다. 이행은 자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과 절친한 친구였다.

이 글은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蝴蝶夢)의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장자(莊子)의 이름이 주(周)이다.

장주(莊周)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자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꿈속에서 장주는 유유자적하여 자기가 장주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윽고 꿈을 깨자 장주로 돌아왔다. 장주는 자기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자기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장주와 나비, 나비와 장주가 또렷이 변별되면서 또한 변별할 수 없으니, 이것이 실로 지극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치는 변별을 양식으로 삼는 지식(知識) 너머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큰 성인이라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호접몽 외에도 장자는 〈제물론〉에서 “큰 깸이 있은 뒤에야 현실이 꿈이었음을 안다.[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하였다. 꿈이라 인식되는 현실뿐만 아니라 꿈인 줄 아는 자신조차도 꿈속의 사람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모두 큰 꿈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고승 서산(西山) 휴정(休靜)이 읊은 〈삼몽사(三夢詞)〉라는 시가 이 이치를 묘파한다.

주인은 꿈속에서 손님에게 얘기하고 / 主人夢說客
손님도 꿈속에서 주인에게 얘기하네 / 客夢說主人
지금 두 꿈을 얘기하는 이 사람도 / 今說二夢客
역시 꿈속의 사람인 것을 / 亦是夢中人

주인과 손님이 각각 자기 꿈속에서 상대방을 마주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꿈속에서 얘기한다고 말하는 자신도 꿈속의 사람이라니, 참으로 큰 꿈이 아닐 수 없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이 시를 두고 “인세(人世)를 꿈으로 본 시가가 고래로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지마는 서산의 20자를 넘어설 작품은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이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도 객체인 현실도 전부가 몽땅 한바탕 큰 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가 모두 꿈속의 허망한 일이라면 눈앞에 엄연히 전개되어 시시각각 접하고 있는 사물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꿈속의 일을 보듯이 막연히 내던져 놓고 말아야 하는가. 작자의 답은 “장주는 그대로 장주라 하고 나비는 그대로 나비라 하느니만 못할 것이니, 이를 ‘인시(因是)’라 하며 이를 ‘불변지변(不辨之辨)’이라 한다. 불변지변은 오직 성인이라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인식할 때 사물과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자기 사이에 ‘나’란 관념, 또는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무너지고 허망한 꿈도 사라진다. 이것이 변별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불변지변으로 큰 꿈을 깨어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접하면서 무엇이건 자기 생각을 가지고서 변별하는 습성이 있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놓고 나와 남, 나와 사물을 변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 바로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느끼는 삶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정한 삶은 큰 꿈인 인식의 변별 너머에 있다. 진달래는 자신이 붉다고 한 적이 없고 개나리는 자신이 노랗다고 한 적이 없다. 진달래는 분별함이 없이 붉은 빛을 나타내고 개나리는 분별함이 없이 노란 빛을 나타내고 있으니, 내가 붉은 진달래를 보고 붉다 하고 노란 개나리를 보고 노랗다 해도 그것은 분별함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불변지변이 아니겠는가.

작자는 불변지변의 이치는 오직 성인만이 안다고 하였지만 나는 아무래도 공사판의 땀에 젖은 사내나 시장판의 목이 쉰 아주머니에게 이 이치를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글쓴이 : 이상하(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1. 적궤(弔詭) : 지극히 이상한 일이라는 뜻이다. “구(丘)와 너는 모두 꿈속에 있으며, 내가 너에게 이처럼 꿈이라고 말하는 것도 꿈이다. 이러한 말을 이름하여 ‘적궤’라 한다.[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 是其言也, 其名爲弔詭.]” 하였다. 《莊子 齊物論》 [본문으로]
  2. 인시(因是) : 모든 것은 상대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고 ‘옳음은 옳음대로 두고 그름은 그름대로 두는 것[因是因非]’이 천리(天理)를 따르는 지극한 도라는 것이다. 《莊子 齊物論》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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