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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지 않은 바보 / 이산해

부흐고비 2011. 5. 17. 09:15

어리석지 않은 바보


사라져 가는 우리의 얼굴들이 있다.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비슷비슷해져 있음을 느낀다. 심각하거나 무표정한 표정에 바쁜 걸음걸이, 얼굴들도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 보인다. 저마다의 개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순박하고 넉넉했던 한국의 표정은 이제 신라의 토우(土偶)나 저 백제의 미륵불, 또는 조선의 민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어수룩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자기 삶을 살았던 한 바보의 얘기에서 잊혀진 우리의 얼굴 하나를 찾아보자.

황보리(黃保里)에 성(姓)은 안(安)이고 이름은 선원(善元), 자는 원길(元吉)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향교(鄕校)에 예속되어 있고 나이는 동렬(同列)들보다 많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를 당장(堂長)이라 불렀다. 그는 사람됨이 감정을 드러내거나 모나게 구는 법이 없어 고을 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깍듯이 예를 갖추고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모멸을 받으면 그럴수록 더욱 공손하였다. 심지어 고을의 젊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대도 나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의 집에는 아내와 자녀, 아내의 홀로 된 어미가 있었고 부릴 수 있는 하인이라곤 여종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나마 이가 빠진 할멈이었다. 논과 밭이 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모두 10여 이랑을 넘지 않아, 오직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 뿐 달리 생계에 보탬이 될 것은 없었다. 매양 농번기가 되어 아내와 자식들이 여종을 앞세우고 나서면, 그는 호미나 낫, 삼태기, 삽 따위를 들고서 뒤 따라 가서 일하다가 날이 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천성이 시를 좋아했지만 이웃에서 그가 시를 읊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루는 계조암(繼祖菴)에 놀러 갔다가 꽃과 달빛이 온 산에 가득하자, 끙끙대며 읊조린 끝에 시구를 지어, “꽃이 산 앞에서 웃으매 소리 들리지 않고 새가 숲 아래 우니 눈물 흘림을 보겠네[花笑山前聲未聽 鳥啼林下淚生看]”라 하니, 듣는 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는 또 술을 좋아하나 늘 마실 형편은 못 되었고, 취하면 몸을 가누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이 동네는 습속이 다투기를 좋아하였다. 한번은 온 동네의 안씨(安氏)들이 모두 뭉쳐서, 방만을 떨던 서얼(庶孼) 소생 이씨(李氏) 한 사람을 성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홀로 이 일에 동참하지 않으니 온 마을 사람들이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뒤 그 이씨가 곤장을 맞아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자 안씨들이 죄에 연루될까 두려워하여 마치 자기가 당한 일처럼 가슴 아픈 척 하며 끊임없이 이씨에게 문안을 가니, 그의 장모가 탄식하기를,

“근심할 게 없는 이는 우리 사위로구나. 내 딸이 우러러 보며 평생을 의지할 배필로 이만하면 되었다.” 하였다.

집안에 물건이라고는 병풍 한 벌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서 군수를 알현하였다. 군수가 그를 앞으로 오게 하고 술을 대접하면서 묻기를,
“이 병풍 끝에 ‘안원길에게 준다[贈安元吉]’라 씌어 있는 것은 자네의 표덕(表德 자(字)의 별칭)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하니, 곁에 있던 장씨(張氏) 성을 가진 좌수(座首)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네게도 자(字)가 있느냐. 이름도 욕된 주제에, 네가 무슨 자를 다 쓴단 말인가.”
하자, 아전들이 모두 곁눈질을 하며 몰래 웃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난감해 하는 기색이 없이 물러나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장씨보다 더 추한 말을 할지라도 내 어찌 감히 노하리오. 설령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마르면 그만이요, 내 귀에 오줌을 눈다 하더라도 씻으면 그만일 것이며, 내 앞에 볼기짝이나 신근(腎根)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냥 똑바로 바라보면 그만일 것이다.”
하고는, 또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산 지 반백년이 넘었는데 비록 영화(榮華)는 누리지 못할지라도 몸에 횡액(橫厄)을 당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병란(兵亂)이 일어난 이래로 우리 마을 사람들을 거의 집집마다 징발(徵發)하여 힘이 강한 자는 관군으로 부리고 몸이 튼튼한 자는 변방에 수자리를 세워, 그렇게 가서 돌아오지 않는 이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유독 나는 어리석은 덕분에 그런 사람들 틈에 끼이지 않아 이 집에서 미음을 먹고 죽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편안히 살아오고 있으니, 밖에서 오는 비웃음이나 모멸 따위야 내가 조금이라도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평해(平海)에 와서 살면서 마침 그와 이웃이었던 터라 그 외모와 행동을 관찰하였는데 멍청하고 어눌하여 말을 제대로 입 밖에 내지 못할 정도였으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외모처럼 그렇게 몹시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의 다툼도 성냄도 없는 마음이야말로, 애써 수양을 쌓은 결과로 화평하고 태연하여 흡사 어떠한 경지에 도달한 듯한 것이 아닐까? 아, 보신(保身)의 도를 얻은 이라 할 것이며, 능히 남과 다툼이 없는 이라 할 것이니, 옛날의 마복파(馬伏波)1와 루사덕(婁師德)2같은 이들도 반드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이로써 그 자손이 본받아야 할 법으로 삼을 것이다.

세상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자들은 혹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을 이유로 마을에서 다투고 관가에 알려서 옥사(獄事)를 일으키고 형벌에 걸리면서도 뉘우치지 않으니, 이 안당장과 비교해 본다면 그 우열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이로써 그의 외모와 재주는 모두 보통사람보다도 못한 것 같지만 자신을 지키는 계책의 주도면밀함으로 말하자면 향리에서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근신한 사람도 미치기 어려울 정도임을 알겠다.

그의 집은 시내 북쪽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는데, 썩은 나무로 기둥을 받치고 울도 담도 둘러치지 않았다. 그는 비가 오면 패랭이를 쓰고 볕이 나면 칠포립(漆布笠 옷 칠을 한 베로 만든 삿갓)을 쓰며,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고 오석(烏石) 빛으로 검은, 가는 갓끈을 드리웠는데 체구는 여위고 키가 크며 검은 얼굴에 희미한 점이 있고 한두 가닥 듬성한 수염이 누렇다. 그가 사는 곳에는 한 해가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그 또한 좀처럼 남의 집에 발길을 들여 놓지 않는다.

내가 그의 자취가 이대로 사라질까 염려하여 이렇게 전(傳)을 짓는다.

- 이산해(李山海) <안당장전(安堂長傳)> 《아계유고(鵝溪遺稿)》

 

 


이숭효(李崇孝)_어옹귀조도(漁翁歸釣圖)_16세기_국립중앙박물관

 

[해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귀양 가서 지금의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란 마을에 살면서 안선원(安善元)이란 사람을 보고 쓴 글이다.

안선원은 향교에 예속(隸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향교의 천역(賤役)을 맡아 보았던 듯하다. 이 당시에는 주로 신역(身役), 즉 군역(軍役)을 면하려고 백성들이 자진해서 향교나 사찰 등의 천역에 예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안선원은 온갖 천대와 수모를 받으면서도 남에게 모진 짓을 할 줄 몰랐던 바보였다. 한편 그는 뜻밖에 시를 좋아하는 풍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끙끙거리며 기껏 읊었다는, “꽃이 산 앞에서 웃으매 소리 들리지 않고 새가 숲 아래 우니 눈물 흘림을 보겠네[花笑山前聲未聽 鳥啼林下淚生看]”라는 시구는 아동들이 한시를 배울 때 읽는 입문서인 《백련초해(百聯抄解)》의 첫째 연구인 “꽃은 난간 앞에서 웃어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는 숲 아래서 울어도 눈물은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에서 한두 자만 어색하게 바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던 것이다.

안선원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 지혜는 이해를 타산하는 작은 마음에서 얻어진 게 아니라 순박하고 넉넉한 그 천성에서 절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속세 사람들의 눈에는 멍청하고 어눌하여 다툴 줄도 성낼 줄도 모르는 바보로 보였지만, 실상은 저 피안에 서서 아등바등 다투는 속세 사람들을 멀리 굽어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가 오면 볕을 가리는 패랭이를 쓰고 볕이 나면 비를 막는 칠포립을 쓰고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고 오석(烏石) 빛 검은 갓끈을 매고 몸은 여위고 키는 크고 검은 얼굴에 희미한 점이 있고 한두 가닥 누른 수염이 듬성하게 난’ 헙수룩한 모습으로, 세상에 답답할 게 없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홀로 걸어가는 안선원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거기에 그가 살았던 시내 북쪽 야트막한 산기슭의 울도 담도 없는 오두막을 배경으로 더하면, 그대로 한 폭 조선의 민화이다. 민화 속에 살고 있는 그는 집안은 가난하고 사람들과 왕래도 없지만 누구에게 기댈 일도, 아무런 구할 것도 없어 마음은 늘 넉넉하고 평안하다.

글쓴이 : 이상하(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1. 마복파(馬伏波) : 후한(後漢) 때의 명장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남을 비평하길 좋아하고 경박한 유협(遊俠)들과 사귀던 그의 조카 엄돈(嚴敦)을 경계한 편지에,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고 남의 장단점이나 정치의 시비를 논하지 말라’고 하면서, 돈후(敦厚)하고 신중한 용백고(龍伯高)란 사람을 전범(典範)으로 제시하며 본받으라고 하였다.《小學 嘉言》 [본문으로]
  2. 루사덕(婁師德) : 당(唐)나라 때의 재상으로, 그 아우가 대주도독(代州都督)에 부임하러 떠날 때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에 재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재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네가 또 주(州)의 수령이 되어 가니,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맡았다고 사람들이 질시할 것인데, 너는 장차 어떻게 소임을 마치겠느냐.” 하였다. 이에 그 아우가 “이제부터는 남이 저의 뺨에 침을 뱉더라도 감히 대꾸하지 않고 스스로 닦음으로써 형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해서는 나의 근심거리가 되기에 알맞다. 대저 사람이 침을 뱉는 것은 노여움에서 나온 행동인데, 네가 그것을 닦는다면 이는 그 사람의 노여움을 거스르는 행동이 될 것이다. 침은 닦지 않아도 절로 마를 터이니 차라리 웃으며 감수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하니, 그 아우가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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