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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李德懋)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했던 이덕무(1741~1793)가 사망하였다. 30년 지기(知己) 박지원은 이덕무의 아들 광규(光葵)로부터 행장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붓을 들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곧고 깨끗한 행실, 분명하고 투철한 지식, 익숙하고 해박한 견문, 온순하고 단아하고 소탈하고 시원스런 용모와 말씨를 다시 볼 수 없음을 애석해했다.
그리고 박지원은 행장 곳곳에서 이덕무의 책에 대한 애착을 언급하였다.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또한 수백 권이 되는데 그 글씨가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라고 한 부분은 이덕무와 책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덕무 역시 스스로 간서치(看書癡)라 자처하였다.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로 불리는 것을 즐긴 것이다.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영처문고(嬰處文稿)에 실려 있는 ‘간서치전(看書痴傳)’의 기록을 보자.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동창ㆍ남창ㆍ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자)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하여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리고 깊이 생각하다가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주선(周旋; 왔다 갔다 걸어 다니는 것)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짖는 듯하였다. 혹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 (看書痴傳)’을 만들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 출전: 국역 청장관전서 영처문고(嬰處文稿)[二] 간서치전(看書痴傳)
이덕무는 스스로에 대한 글을 자주 남겼다. ‘자언(自言)’에서는
사람이란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변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변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장난을 하지 않고 망령되고 허탄하지 않으며 성실하고 삼가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웠는데, 자라서 어떤 사람이 권하여 말하기를, “너는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니 세속에서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므로 그도 그렇게 생각하여, 입으로는 저속하고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몸으로는 경망하고 부화(浮華)한 일을 행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3일쯤 하고는 축연(蹙然)히 기쁘지 않아서 말하기를, “내 마음은 변할 수 없다. 3일 전에는 내 마음이 든든한 듯하더니 3일 후에는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하고는 드디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이욕(利慾)을 말하면 기운이 없어지고, 산림(山林)을 말하면 정신이 맑아지며, 문장을 말하면 마음이 즐겁고, 도학(道學)을 말하면 뜻이 정돈된다. 완산(完山) 이자(李子; 이덕무 자신을 칭함)는 옛날 도(道)에 뜻을 두어 오활하다. 그래서 산림ㆍ문장ㆍ도학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나머지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또 들어도 마음에 달갑게 여기지도 않으니 대개 그 바탕[質]을 전일(專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귤(蟬橘)을 취하고, 말하는 것이 고요하고 담박하다.
- 출전: 국역 청장관전서 영처문고(嬰處文稿)[二] 자언(自言)
▶ 이덕무가 검서관으로 14년간 근무했던 규장각
이덕무는 자신의 호에 관한 기록인 ‘기호(記號)’라는 글을 통해서는 자신의 삶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삼호거사(三湖居士)는 약관(弱冠) 시절에 호걸스러운 기개(氣槪)가 있었다. 씩씩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는[莊敬日强] 공부에 뜻이 있어 일찍이 호(號)를 ‘경재’(敬齋)라 하였다. 뜻이 있으면 바로 지표(指標)가 있으니 여기에 이르고자 하여 이에 또 호를 팔분당(八分堂)이라 하였으니, 팔분이란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의 자)의 구분(九分; 성인을 10분이라고 볼 때 9분이면 대현이라 한다)에 가까운 것이다.
빈한하여 집은 한 말(斗)처럼 작았지만 또한 즐거워하여 이에 매미의 껍질[玄蟬之殼]과 이수의 귤[二叟之橘]에 구부려 있다 하여 또 호를 선귤헌(蟬橘軒)이라 하였으며, 처지에 따라 닦으려 하여 또 호를 정암(亭巖)이라 하였다. 은둔(隱遯)을 편안히 여겨 또 을엄(乙广; 구부러지고 조그마한 석실(石室))이라 하여 은둔하려 하였으며, 마음을 물처럼 잔잔하고 거울처럼 맑게 하고자 하여 다시 호를 형암(炯菴)이라고 하였다.
대저 일마다 공경하여 닦으면 고인(古人)에 가까우며,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 하고 은둔하여 작은 집에 누워 부엌 연기가 쓸쓸하여도 붓을 잡아 문장을 지으면 아침에 피는 꽃과 같이 빛난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도 오히려 편안하지 아니하여 빙긋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어린아이가 재롱을 좋아하는 것이다. 장차 처녀와 같이 지키려 한다.”하고, 그 원고에 제(題)하기를 ‘영처(嬰處)’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자기의 훌륭함을 감추고는 어리석고 미련한 듯하였다. 단정한 사람이나 장중한 선비에게도 기뻐하고 장꾼에게도 기뻐하였으니 대개 빈 배를 외로이 띄워 어디를 가나 소요유(逍遙遊;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노는 것) 아님이 없는 것이리라. 이에 사람들이 또 이 때문에 호를 감감자(憨憨子)라 부르기도 하고, 범재거사(汎齋居士)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삼호에 거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삼호거사(三湖居士)라 하였으니, 이것이 호의 시초이다.
- 출전: 국역 청장관전서 영처문고(嬰處文稿)[一] 기호(記號)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책만 보았던 바보 이덕무. 그러나 이덕무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독서력과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에 두루 능통했던 해박한 지식은 조선후기 지성사를 풍요롭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알아본 정조에 의해 이덕무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면서 정조시대 문화 중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가을날 독자들의 왕성한 ‘독서벽(讀書癖)’을 기대한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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