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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유(色喩)
세상에서 색(色)에 혹하는 자가 있는데, 소위 색이란 것은…푸른 것인가, 붉은 것인가? 해ㆍ달ㆍ별…새ㆍ짐승이 모두 빛이 있으니, 이것이 능히 사람을 현혹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금과 옥…의상…, 궁실(宮室)…, 비단ㆍ깁이나 명주의 섬세하고도 가냘픈 것,…이것이 능히 사람을 현혹하는가?…그런 것도 아니다.
대개 이른바 색이란 것은 사람(여자)의 고운 빛이다. 푸른 머리, 흰 살결, 연지로 태깔 나게 꾸미고, 마음으로 도발하며 눈으로 마주치면, 한번 웃음에 나라를 기울이니, 보는 자는 모두 정신이 아찔하고, 만나는 자는 모두 마음이 현혹되어, 몹시 귀애하고 사랑하기에 이르면 비록 형제와 친척이라도 그보다 못하게 여겨진다.
색(色)의 아름다움을 들으면 곧 가산(家産)을 망치게 되는데도 그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색의 유혹에 빠지면, 호랑이를 해치려하는 일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들기를 사양하지 않는다. 좋은 색을 집안에 기르면 많은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아름다운 색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공명(功名)도 떨어져 달아나버리고 만다. 크게는 임금, 작게는 공경(公卿)과 선비가 나라를 망치고 가정을 잃음이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주(周) 나라의 포사(褒姒)1와 오(吳) 나라의 서자(西子)2며, 진 후주(陳後主)의 여화(麗華)3, 당 현종(唐玄宗)의 양씨(楊氏)4가 모두 임금께 아양 떨고 임금을 현혹시켜 화(禍)의 근원을 길러…그 때문에 무너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작게는 녹주(綠珠)5의 아양 부리는 태도가 석숭(石崇)을 망치고, 손수(孫壽)6의 요망한 단장이 양기(梁冀)를 현혹시켰으니, 이와 같은 유례(類例)를 어찌 모두 적을 수가 있으랴?
아, 나는 장차 풀무를 돌리고 숯을 피워 모모(嫫母)7ㆍ돈흡(敦洽)8의 얼굴 천만 개를 주조(鑄造)하고, 그 요망스러운 얼굴들을 모조리 그 속에 가두어 버리려 한다. 그런 뒤에 칼로 화보(華父)9의 눈을 후벼다가 정직한 눈알로 바꾸고, 쇠로 광평(廣平)10의 창자를 만들어 음란한 자의 뱃속에 집어넣으려 한다. 그리하면…모장(毛嬙)11과 서시(西施)의 예쁨이 있어도 돈흡과 모모에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제 어찌 현혹됨이 있으리오?
이규보, <잡저(雜著)> 《동문선 제107권》
- 주 유왕(周幽王)의 총희로,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를 올리곤 하다가 정작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이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미인계로 바쳤던 여자. 부차는 그녀가 좋아하는 뱃놀이를 위해 대운하 공사를 벌이고, 그로 인해 국력이 낭비되어 월나라와의 대적에서 패한다. [본문으로]
-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장여화(張麗華)라는 소녀를 총애해서 정사를 볼 때에도 무릎에 앉힌 채로 대신들을 맞았다고 한다. 결국은 수나라 양제(煬帝)에게 패하였다. [본문으로]
- 양귀비(楊貴妃)는 원래 당 현종의 총희.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힌다. 현종은 원래 며느리였던 그녀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에게서 빼내고, 궁 안에 도교사원을 짓고 그곳의 여관(女官)으로 불러들인다. 그녀의 애인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당나라는 서서히 몰락한다. [본문으로]
- 진(晋)의 석숭(石崇)은 거부(巨富)였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하면서 호화로운 풍류를 즐겼다. 그의 애첩(愛妾) 가운데 녹주(綠珠)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당대의 권력자 손수(孫秀)가 그녀를 빼앗으려다가 이루지 못하자 왕의 명령을 가장하여 석숭을 체포하여 죽였다. [본문으로]
- 손수(孫壽)는 후한 환제(桓帝) 때 권력을 잡은 대장군 양기(梁冀)의 아내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드센 성격을 가졌다. 손수는 양기를 움직여 손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게 했다. 양기가 미녀 우통기(友通期)와 간통하자, 우(友)씨 집안사람들을 몰살시켰다. 나중에 환제의 노염을 사게 되자, 남편과 함께 자살했다. [본문으로]
- 모모(嫫母)는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의 이름으로 어질고 덕이 높았으나, 얼굴은 추하고 못생겼다고 한다.《열녀전》 [본문으로]
- 돈흡(敦洽)은 전국 시대 진(陳)나라 추녀로서 덕(德)이 높아 진후(陳侯)에게 발탁되었다.《呂氏春秋 過合》 [본문으로]
- 송나라 사람. 화보는 자이고 이름은 독(督). 길에서 공보(孔父)의 처를 보고, 그 요염함에 반하여 공보를 죽이고 그 아내를 탈취하고야 만다. 그런데 이 일로 송나라 상공이 크게 노하자,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그 군주마저 시해해 버렸다. [본문으로]
- 광평(廣平)은 당나라 송경(宋璟)의 자(字). 사람들은 그가 정조가 굳고 마음이 철석같아 고운 문장은 짓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그가 지은 매화부(梅花賦)는 청신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본문으로]
- 모장(毛嬙)은 서시(西施)와 함께 고대 미인으로 손꼽히던 여인으로 월왕 구천이 사랑하던 후궁이다.《戰國策 齊策》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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