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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젊은이의 기개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0. 11:13

버트런드 러셀은 언제나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어린이보다는 가끔 말썽을 부리는 어린이가 도리어 장래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특히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근성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더러는 권위에 도전하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전통 윤리에 따르면, 웃어른에게 항거하는 언행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다. 특히 부모나 스승에 대해서는 무조건 순종을 해야 하며, 그래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는 말이 칭찬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세상 풍조가 크게 달라져서 자녀가 부모의 뜻을 어기거나 학생이 선생에게 반항하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도 점차 민주주의 방향으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젊은이들의 기개도 높아졌다고 보는 해석이 일단 성립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어린이 또는 젊은이의 반항이 언제나 높은 기개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항이 기개의 표현인 것은 반항의 대상이 강자일 경우이며, 비록 명목상으로는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무서울 것이 없는 어른에게 항거하는 것은 못난 젊은이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의 부모나 학교 선생은 자녀 또는 학생들의 눈으로 볼 때 별로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무서울 것이 없는 부모나 학교 선생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은, 기개나 용기가 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육이 잘못된 증거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막강한 권력 또는 막대한 금력 앞에서 굽히지 않고 소신대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진실로 기개가 높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집에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학교에서 선생에게 항거하는 청소년이 많은 데 비하여 직장 또는 사회의 강자 앞에서 당당하게 소신대로 언행하는 젊은이가 적은 것은 아직도 한국의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이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선생들이 좋게 말하면 관대하고, 나쁘게 말하면 비교육적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부모나 학교 선생들이 권위주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옛날의 부모나 학교 선생들보다 나으나, 교육자로서의 자신감이 없다는 점에서는 옛날의 부모나 학교 선생들보다 크게 못하다.

직장의 실권자들이나 사회 일반의 실력자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가정의 부모나 학교의 선생들처럼 물렁물렁하지 않은 것이다. 가정에서 또는 학교에서 하던 버릇을 직장이나 그밖의 강자들과 만나는 자리에까지 연장을 했다가는 무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학생 시절에는 제법 기개가 있는 듯이 보였던 젊은이들도 직장인이 되면 대개는 온순한 사람으로 변한다. 누울 자리 보아가며 다리를 뻗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에서는 사라져 가고 있는 권위주의가 직장, 사회에서는 대체로 옛모습을 지키고 있다. '하극상(下剋上)은 있을 수 없다'는 군대식 사고방식은 정치와 행정 그리고 기업의 세계에서 강한 힘을 장악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일반적 상식이다.

만약 정치와 행정 그리고 기업 세계의 강자들이 좀 더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젊은 부하의 바른말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풍조였다면, 한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기개와 용기를 길러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대화 및 협동의 길도 넓게 열렸을 것이다.

강자에 대한 반항이라고 해서 모두 기개와 용기의 나타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서가 불안한 사람은 쉽게 흥분하기 쉽고 흥분한 상태에서는 기개가 용기와는 다른 심리작용으로 강자에게 대들 수가 있다. 신경질적 발작이 앞뒤를 가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것이 진정한 용기의 표현이라고 착각하여 자기의 감정적 처신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무릇 인간이 취하는 태도나 주장에는 정당성이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어린이나 약자가 취하는 태도나 주장은 그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어른 또는 강자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정당한 태도나 주장이 강자의 힘에 의하여 부당하게 억압을 당할 때, 이 억압에 굴하지 않는 것은 기개와 용기의 표현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당성이 없는 반항의 경우는 사정이 좀 복잡하다.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감히 반대의 주장을 하거나 항거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 나름으로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미숙하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객관적 타당성을 결여한 경우가 흔히 있다. 이런 경우에도 윗사람으로서는 단숨에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사리를 밝혀서 납득이 가도록 설득하는 것이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길이며, 오직 여유가 넉넉하고 지혜가 높은 윗사람에만 가능한 처사이다. 지적 대화로써 슬기롭게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은 인간이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의견이나 태도가 맞서는 쌍방은 각자 자기의 입장이 옳다는 선입견에 묶여 있는 까닭에 상대편의 주장에 냉정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고, 우선 감정부터 앞서서 기세를 올리기에 급급하다. 결국 지성적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지성적으로 생각하고 지성적으로 행동하는 버릇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어린이들에게 그런 버릇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실천적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교과서나 설교만으로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리를 따라서 냉철하게 생각하는 지성만으로 바람직한 사회 발전을 위해서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 부당한 것에 대해서 당당히 맞서는 용기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서 모험을 무릅쓰는 기개가 필요하거니와 그 용기와 기개는 단순한 자성과는 성질이 다른 심리작용이다.

러셀이 젊은이들의 기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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