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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우뚝한 탑 / 나식연
2016.9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그림 한 점을 샀다. 인터넷 미술사이트에 ‘국보 16호 칠층전탑’ 유화 한 점이 경매에 나왔다. 보름 달빛 아래 홀로 우뚝한 탑의 기상에 끌려 바로 응찰했다. 며칠 뒤 배송받은 그림은 놀랍게도 컴퓨터에서 본 느낌과 달랐다. 섬뜩하고 불길했다.
시간을 두고 다시 보아도 나쁜 기운이 깃든 것 같이 괴기스러웠다. 집에 걸어두면 흉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어렵게 낙찰받았지만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림을 보는 순간 왜 그렇게 느꼈을까? 자꾸만 궁금증이 일었다. 그림과 똑같이 보름달이 뜨는 날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달빛을 밟고 들어선다. 우람한 자태의 탑이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 있다. 그림에서 보았던 구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들리는 밤벌레 소리에 달빛만 더욱 교교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잡풀이 수런수런 소리를 낼 뿐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술래가 된다. 탑은 마치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듯 골목에 숨어있다. 경이롭다. 대부분 탑은 너른 터에 자리를 잡아 하늘을 우러르고 섰는데 이 탑은 뒷방에 물러앉은 노인 같다. 그래서일까. 이어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이어졌다 끊어지는 풀벌레 울음이 신음처럼 들린다. 인적도 없다. 사람 대신 간간이 밤바람만 불어온다. 허공의 보름달과 태고의 탑이 밤에 달려온 나그네의 감회를 부추긴다.
천천히 탑돌이를 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숙명으로 사람들의 삶을 안아주며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탑. 천 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켰으니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림과 달리 그다지 괴이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로 지금은 골목 안에 갇히고 말았지만, 더는 훼손이 안 되도록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몫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밤이 이슥하다. 달빛에 휘감긴 탑을 몇 번이나 훑으며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그림을 받아든 그때의 첫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꾸만 발목을 붙잡는다. 밝은 날에는 어떤 모습일까. 이른 새벽에 다시 집을 나선다. 도착하니 아침 해가 기지개를 켠다.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드는 철도 굴다리를 들어서자 탑이 보인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소리에 탑은 이미 깨어난 듯하다. 전율이 스친다. 고개를 들어 옥개석을 세어보다 유난히 맑은 하늘빛에 현기증이 난다. 어젯밤과는 또 다르게 나를 신라 시대로 데려다 놓는다.
시끄러운 연장소리와 장정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낙동강에 발을 담근 영남산 기슭의 법흥사에서는 탑 세우는 일이 한창이었다. 일꾼들은 강가의 개흙을 퍼와 벽돌을 구웠다. 부재로는 석재보다 벽돌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사에 참여한 인부들도 공덕을 닦으려고 다투어 일했다. 마침내 칠 층까지 차곡차곡 올리는 대역사를 이룩했다. 기단에는 사천왕상,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을 붙이고 감실을 크게 넣어 예불 공간을 넓혔다. 상륜부에는 금동제를 장식해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완성된 ‘법흥사 칠층전탑’은 등대처럼 빛났다. 탑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멀리 반변천이 합류되는 곳은 바다처럼 강폭이 넓어 풍광이 장쾌하였다. 거기에서 봐도 탑은 우뚝해 보였다. 불심으로 세워진 탑은 칠흑같이 어두운 뱃길에서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등불이 되었다. 긴 강을 굽어보며 사람들의 무사 안녕을 지켜보며 그들의 든든한 생명줄이 되어주었다. 신라인들은 몸과 마음이 탑과 하나가 되는 불국토를 만들어 나갔다.
덜커덩덜커덩, 귀청을 찢는 소리에 환상에서 깨어났다. 탑의 가슴팍 앞에 가로 놓인 철길 위로 화물열차가 굉음을 내며 사라진다. 별안간 그림의 기억이 떠오른다. 의문이 풀린다. 이 탑은 지금 아픈 게 분명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차의 진동을 견뎌내야 하는 몸살에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이면을 꿰뚫어 보는 화백의 안목이 놀랍다. 그는 천 년이 넘는 탑이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법흥사는 이제 없다. 절은 사라졌지만, 온종일 굉음과 진동을 감내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이 대견하다. 통일신라 때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만든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17m 높이로 우리나라 탑 중에서 제일 크다. 안동시 법흥동, 그곳에 국보 16호로 우뚝하게 홀로 남아 있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밤에 조명을 밝히는 유적지가 많건만, 여기는 오로지 달빛과 별빛뿐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오다 뒤를 돌아본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탑 앞에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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