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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사 / 나식연
제8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비 갠 산등성이에 흰 구름 한 덩이 그림처럼 놓여 있다. 청도 와인터널 앞, 뭇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호황을 누리는 이곳과는 달리 대적사로 가는 길은 한갓지기만 하다. 마치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는 기로인 듯하다. 홀로 걷기에는 왁자한 곳보다 한적한 길이 낫다. 나는 깊은숨을 쉬며 천천히 좁은 길로 들어선다.
길은 감나무밭 사이로 뻗어 있다. 아련히 들려오는 독경 소리에 풋감들이 포실히 익어간다. 푸른 감도 나도 속이 더 여물기를 소망하며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흙길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생기 넘치는 초목들이 짙푸른 바다 같은 눈맛을 느끼게 해준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자연이 오롯이 들어앉았다.
이끼가 뒤덮인 노송들이 운치를 더한다. 물을 찾아 뻗어 나온 뿌리가 아름드리 거목을 살리고 있다. 대견하다. 여기저기 무리 지어 핀 상사화가 낯선 객을 반겨주듯 하느작거린다. 저 굽이 돌아서면 닻을 내린 반야용선이 정박해 있겠지. 설렘으로 다가서니 동학산의 화룡점정 같은 대적사(大寂寺)가 고요히 좌정하고 있다.
천년의 바람을 맞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두 눈을 부릅뜬 금강역사가 시퍼런 칼을 들고 나를 쳐다본다. 무서운 생김새가 오히려 익살스럽다. 반야용선이라 불리는 극락전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할 줄 알았는데 소박한 게 일엽편주가 따로 없다.
긴 세월을 품어 안은 절이 수수하다. 청렴한 도량을 서성이는 바람도, 마당 안으로 들어온 구름도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천 년 전에도 같은 소리를 냈을 극락전 추녀의 풍경이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그때의 시간이 고여 있는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게 경이로울 뿐이다.
극락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작고 조촐하다. 불심을 담아 공들여 지었을 창건주의 정성이 가득 스며있다. 기단은 어딘가 모르게 고찰의 위엄을 풍긴다. 계단 오른쪽에는 용비어천도, 왼쪽엔 파도를 상징하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기단 전체에는 거북과 게, 연꽃, 파도 무늬, 물고기가 돋을새김 되어 눈길을 끈다. 영락없이 기단은 바다이고 법당은 배를 상징했다.
기단 한쪽에 새끼를 물고 가는 어미 거북 뒤로 게가 쫓아간다. 있는 힘을 다해 오르려는 악착같은 모습에 용이 쓰인다. 그 밑 작은 화단에도 허물을 남긴 매미의 우화가 보인다. 가장 낮은 땅속에서 높이 나는 생으로 바뀌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무의 우듬지 위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미물이라도 생각이 있기에 여기에서 허물 벗기를 하지 않았을까. 마음은 잠시 속세를 잊는 중생이 되고 걸음은 어느새 극락전 안에 들여놓는다.
법당에는 목조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을 보면 감흥이 일어난다. 닫집의 단청은 낡긴 했어도 고풍스러웠다. 삼배를 드린다. 극락정토를 간절히 구하고 싶었지만 이 또한 욕심인지라 무심히 절만 올린다. 한참이나 여래와 눈 맞춤을 한다. 속세와 피안의 길에서 무언의 선문답을 얻으며 뒤돌아선다.
번잡한 생각을 내려놓게 하는 계단 한 칸 한 칸이 자비의 문처럼 느껴진다. 한 그루의 큰 소나무가 극락전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다. 예사롭지가 않다. 피안으로 인도하는 대적사라는 배가 어떠한 풍랑에도 떠내려가지 않게 닻을 내리고 지키는 호위병 같다.
바람이 순하다. 이 한 줌의 바람조차도 돛의 역할을 했으리라. 문양이 바다를 묘사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가르침을 얻는다. 점심 공양하고 가라는 보살의 곰살궂은 말에 합장으로 답례한다. 먹지는 않았지만 자비로운 마음에 허기를 달랜다. 어떻게 이런 산속에다 보물을 만들었을까 어리석은 궁금증을 안고 물러 나온다. 떠나려는 객에게 천년의 도량이 은은하게 물어온다. 오늘 그대가 머문 곳이 정토이었던가?
잡초가 더북한 길섶에 부도 하나가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백 육십여 년 전에 봉안된 풍엄대사 순민의 부도였다. 여느 절 같으면 부도군(浮屠群)을 이루고 있으련만 오직 한 기뿐이니 사찰 이름만큼이나 적적해 보인다. 그나마 분홍색 상사화가 피어 있어 다행이다.
청도 동학산에 가부좌를 튼 대적사. 온아한 품새를 갖춘 작은 절은 신라 헌강왕(876년) 때 보조선사가 창건했다. 여러 번의 전란을 겪은 탓에 상흔이 남아있었지만 꾸준히 손질하여 지켜온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산속에 외로이 떨어져 인적이 드문 천년 고찰 대적사,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숲을 바다 삼아 닻을 내렸다. 반야용선인 극락전은 긴 시간을 관통해 마침내 1984년에 보물 제836호로 지정되었다.
‘빈 배는 선이요 구도자요 공덕’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십구재의 마지막 재는 망인의 혼을 종이배에 실어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지도 모른다. 법당이 곧 망자를 피안으로 인도해 준다는 반야용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길을 내려오면서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걸었다.
여전히 와인터널은 붐비고 대적사로 오르는 길은 한산하기만 하다. 이 오솔길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 좋겠다. 반야용선이 정박한 이곳에서 사바세계로 접어드는 걸음이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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