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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에 대한 통찰 / 정목일
수필을 30여 년 넘게 써오면서, 자족과 불만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불만족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수필에 대한 문단과 일반인들의 아웃사이드문학, 비전문 문학 장르로 인식하여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 점이고, 자족은 논픽션인 까닭으로 어찌 되었건 자신의 삶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아내고 있는 점이다.
나는 1975년 ‘월간문학’과 1976년 ‘현대문학’지의 수필 당선과 수필 천료를 통해 우리니라 최초의 종합문예지 등단 수필가가 되었지만, 그 때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수필의 길을 갈 것인가, 진로를 수정해야 할 것인가? 번뇌와 방황이 있었다. 수필은 허약했고 진로도 막막했으며 신명이 나지 않았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수필 따위에 눈길을 주거나 관심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수필 첫 데뷔자라는 긍지와 부추김 때문에, 30여 년이 넘게 수필의 길을 걷고 있다.
소설은 픽션이므로 대개 특별, 비정상, 문제성, 불륜, 기적, 기상천외 등으로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상상의 창고에서 어떤 것이든지 기발하고 흥미로운 재제를 동원할 수 있다.
수필의 경우는 자신의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다. 자신이 주인공이고 작가다. 자신의 삶이 글의 재제가 된다. 생활인의 삶은 대개 사소하고 평범하다. 일상은 특별하지 않고 무덤덤하고, 누구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하품이 나고 별 볼 일이 없고, 신날 것도 없는 삶이 지속되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에서 온갖 흥미로운 재제와 구성을 동원하여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지만, 수필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체험’으로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끌어당길 수 있을까? 이것이 수필의 화두다. 소설이 상상력과 테크닉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면, 수필은 작자의 삶과 인생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 인생경지가 곧 수필경지가 된다. 수필쓰기는 인생의 토로와 고백성사(告白聖事)이기에 인생이 곧 악기이고 종(鍾)에 해당된다. 인생이란 악기가 훌륭하여야만 소리가 훌륭할 것이고, 인생이란 종이 좋아야만, 소리도 좋을 것이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문장에서 향기가 나며, 덕망이 있어야 문장에서 온기가 흐른다.
오늘날 수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고 있지만, 양적인 평창에 비해 질적인 발전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고 문제점이다. 수필인구 증가와 더불어 주제, 재제, 테크닉 등에 있어선 다양성과 많은 개척을 보이지만, 정작 좋은 수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시와 소설에선 문제작가가 나타나 선풍을 일으키고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지만, 수필 계는 정적 속에 파묻혀 있다. 좋은 수필 한 편을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인생과 고결한 영혼의 발견이며 만남이다.
현대엔 물질은 풍요하나 정신은 황폐하고, 지식은 충만하나 지혜가 부족하다. 재주는 범상하나 인격이 부족하고, 교사는 있으나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다. 인생 연마와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드물고 성공, 처세, 재테크 등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문장에서 매화 향기가 나고 깨달음의 종소리가 울리는 수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기를 습관적으로 쓰기 어려운 것은 일상의 무변화일 것이다. 별 다르지 않는 일상을 매일 기록한다는 것에 싫증과 짜증이 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수필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써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관심조차 갖지 않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삶의 장면을 형상화해 놓음으로써,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됨을 느낀다.
모든 문학서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다면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었다’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사소한 체험, 생각과 느낌, 발견과 깨달음을 글로 담는다는 것은 존재의식의 발로이며 한시적인 삶을 살 뿐인 인간이 영원을 수용하는 유일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수필쓰기는 특별함, 기발함, 흥미로움에 대한 것이 아닌 사소함, 평범, 일상에 대한 발견이고 의미 부여다. 사소함 속의 위대함, 평범 속의 비범, 일상 속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삶 속에서 개성과 새로움에 대한 발견이며 탐색인 셈이다. 사소함 속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보석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자신 만의 모습, 빛깔, 향기로 인생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일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고 그의 ‘수필’에서 쓰고 있다. 수필이 인생을 담는 그릇에 비유한다면, 나에겐 ‘청자연적’은 맞지 않다. 내 인생을 담는 그릇은 가야토기가 적합하다. 인생을 화초에 비유하자면 난, 장미, 국화, 모란과 같은 꽃과는 거리가 멀어, ‘호박꽃’, ‘박꽃‘ ’민들레‘ ’풀꽃‘을 맞아들였다. 사소하고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나만의 생각과 느낌과 발견을 꽃피워내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사소하고 평범하여 글로 담아내지 않으면 망각 속에 퇴색되어 자취조차 없어져버릴 것들, 사실은 그런 것들로서 인생이 이뤄지고 마침내 사라질 존재가 아닌가. 자신의 사소한 삶과 인생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고 싶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이 위대하고 화려하고 특별하길 바라지만, 대개는 사소하고 평범하다. 초라하고 가여워 보이는 삶과 일생일 지라도, 의미와 가치의 빛깔과 향기를 내고 싶어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삶과 체험들을 제재로 어떻게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수필을 쓰는 데 항상 염두에 두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 있고, 들리는 것은 들리지 것은 것에 닿아 있고, 생각나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이 닿아 있다.’ <노발리스(1772~1801)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나는 것을 글로 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평범하다. 문학적인 사고나 표현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를 가져야만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오늘날 지식정보시대를 맞아 문학작품에도 지식의 홍수가 넘치고 있다. 수필에도 지식의 나열과 과시를 본다. 지식이란 바깥에서 들어온 앎이다. 처음엔 경탄과 경이의 눈길을 보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목이 마르게 된다. 지식이란 과거의 소산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의 것이며 상식성에 속한다. 지혜란 자신의 내부에서 체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꽃이다. 지혜는 일생에 한 번 피울 수 있는 귀중한 꽃이다. 문장에 지식과 정보의 나열이 많은 것보다, 체험을 통한 발견과 지혜가 담긴 수필이 되길 원한다.
생전에 스승으로 섬겼던 피천득 선생 댁에 일 년에 두 세 번씩 들러 인사를 드리곤 했다.
선생께선 50년 전에 절필하시고,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종전 작품보다 잘 쓰지 않으면 더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지니셨다. 완벽한 문장쓰기로 명작을 내놓으신 대가다우신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절필이란 작가에게 폐업이나 다름없는 일이고, 작가로서의 생명을 끊는 일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독자들은 왜 50년간 한 편의 수필을 쓰지 않았던 금아 선생의 옛 수필을 사랑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애독하고 있는 것인가. 피천득 수필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다작에 있음이 아닌, 질 높은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금아 선생의 말을 듣고 절필에 대한 생각을 가져보았다. 종전보다 잘 쓰거나 못 쓰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사명은 쓰는 데 있을 것이다. 절필의 단호성을 강조하시는 금아 선생께 “그렇더라도 선생님의 60, 70, 80대의 삶과 표정이 담긴 글을 독자는 그리워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깨달음의 종소리가 들리고 향기가 나는 수필을 바란다.
‘에밀레종’ ‘상원사종’이라 불리기도 하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종명(鐘銘)에 ‘일승(一乘)의 원음(原音)’이란 말이 나온다. ‘종소리를 한 번 울려서 듣는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것’을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가진 이 종이 울리면 음파가 길고 그 속에 은은히 떨며 퍼져가는 맥놀이의 긴 여음이 들릴 듯 말듯 영원 속으로 닿아간다. 상원사 종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종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신라인들이 마음을 모아 주조한 종이었기에, 그 소리는 더 없이 맑고 신비롭다. 수필은 개개인이 들려주는 에밀레종이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의 재제는 일상과 신변잡사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종소리처럼 깨달음이 울려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 고백성사의 문학이란 말을 한다. 마음속에 거울을 달아두어서 자신의 영혼을 비춰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의 거울에 묻은 이기 집착이라는 때, 화냄이라는 얼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에 샘을 파두어서 언제나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수필이 주는 혜택 중엔 고해 성사로 마음속에 박힌 못을 빼어내고, 상처, 대립,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일도 즐거움이자 깨달음이다. 수필은 한정적인 삶을, 보다 의미 있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가치롭게 해준다. 사소한 일상도 의미라는 빛깔과 향기를 입히게 되면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 수필쓰기의 큰 성과가 아닐까 한다. 모든 것들이 덧없이 다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시간이 뿌려대는 망각의 바이러스를 오래도록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원 장치가 삶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수필, 무명이 피우는 풀꽃일지라도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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