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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등(枕燈) / 허세욱
내게 40센티 쇠막대의 전등이 있다. 그 이름도 쓰임에 따라 달랐다. 책상에 있을 때는 서등書燈이요, 베갯머리에 놓일 때는 침등이다. 그 조형이 단조롭거니와 무게도 헐쭉해서 한손으로 들기에 넉넉했다.
1미터 높이의 책상에서 끄적거리다가 나른해지면 슬그머니 그 아래로 눕는다. 바닥에 요를 깔면 당장 침상이 된다. 그 머리에 베개를 놓고 그 바른편에 등을 옮기면 아늑한 촉광의 침등이 된다.
등이 내 총애를 받는 까닭은 그 배꼽에 달린 잠자리 눈깔만 한 스위치의 민첩 때문이었다. 안개처럼 스르르 잠이 몰려올 때 살짝 기지개를 펴거나 손사래치듯 그 스위치에 손등을 대면 세상은 한 찰나에 어둠이 밀려왔고 나는 그 속에 침몰했다. 그것이 민첩할 뿐 아니라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던 것도 내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나는 요즘 들어 갈수록 일찍 침등 곁으로 갔다. 9시 뉴스가 끝나기 전 나는 문을 닫고 혼자만의 방에서 우윳빛 등불 속에 푹 가라앉고 싶다. 거기 깊숙한 물밑에서 아무도 번잡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누리고 싶다.
거기 작은 등 하나와 마주보면 숙명 같은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등만을 보면서 등만을 의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영토를 확인한다. 등불이 미치는 곳을 나의 땅으로 생각할 때 등은 나의 군주인 것이다. 눕기 전 신간 몇 권을 머리맡에 쌓아둔다. 누워서 미지의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때로는 난해한 책도 일부러 곁들인다. 누워서 몽롱한 우주의 꼬불꼬불한 골목에서 방황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방자한 자세로 그것들을 섭렵한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시냇물 아장아장 걸어가듯.
한 잠을 자고난 누에가 사각사각 뽕잎을 먹듯. 얼마쯤 걸었을까? 얼마쯤 먹었을까? 눈이 가물가물하고 팔이 시큰 시큰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나루터, 거기 산 그림자가 누워있는 물안개 저편으로 가면,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저들 물이 소리 없이 흘러가듯 나도 가자. 빠이빠이 나는 손사래 쳤다.
침등을 베갯머리에 앉히면서 나의 밤은 평온했다. 어쩌다가 꿈속에 길을 잃거나 밉고 서러운 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없지 않지만 저 쇠막대와 책이라는 수면제가 내 머리맡에 있기에 두렵지 않았다. 다만 손사래 한 번이면 광명천지를 언제든지 손쉽게 만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러면 나는 나루터에 배를 댄 사람처럼 주섬주섬 상륙을 단행한다. 상륙과 동시 내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계속한다.
광명과 암흑이 생과 사의 상징이라면 나는 손사래 한 번으로 손쉽게 생사를 왕래했다. 하룻밤에도 몇 차례를 그렇게 한밤 한 자락을 잘라서 수면제를 읽고나면 잘 끊인 원두커피를 마신 아침처럼 상쾌했다. 그렇게 한밤 한 자락에 다시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나루 그 뱃전에 몸을 실으면 둥둥 흘러갈 뿐 결코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몇 년 전, 중국 만리장성의 끝자락 가욕관에 갔을 때, 거기 신성新城에 있는 위진魏晋시대 옛 무덤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지하 경사진 묘도를 지나자 정갈한 묘실이 보였다. 마치 지하의 아파트를 연상케 했다.
그 중에도 일직선의 길쭉한 아파트를. 묘실은 세 칸, 위진 때 떵떵거렸던 장원莊園의 무덤이었을지 모른다. 맨 앞 칸 전실은 오늘의 사무실격, 훤칠하게 넓었다. 다음의 중실은 거실격, 장중한 분위기에 아담한 집기, 마지막 후실은 침실격, 곧 관을 놓았던 곳이다. 세 방은 모두 벽돌로 쌓였고, 벽돌의 대부분은 그림을 그려서 구운 화전이다. 그래서 위진 고묘를 지하 화랑으로도 불린다. 더구나 사실적인 화풍에 혀를 내둘리기 마련이다. 그때 3, 4세기 때 귀족과 농경 사회의 생활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서였다.
천정은 둥그렇다. 하늘을 방불케 했다. 하늘을 정점으로 벽돌이 방사선을 치면서 바닥까지 내려 왔다. 더구나 후실의 구조가 선명했다. 나는 그 비인 방 한쪽 벽에서 등잔 받침을 발견한 순간, 경이로운 탄성을 질렀었다. 아니, 죽음의 땅속에 등불이라니? 산소가 없는 곳에 심지는 무슨 힘으로 가물거렸을까? 등불이 가물거렸다면 하필 죽음일까?
이렇게 의아하고 이렇게 설레일 때, 안내인은 나더러 저 천정을 보라했다. 그 둥그런 천정의 중심을 가리키면서 옛날엔 거기에 구멍이 뚫렸었노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 그 방의 주인을 안치했을 때만도 여기에 초를 켰거나 호롱에 점화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주인은 세상을 떠났어도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국땅 저 머나먼 곳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릇 등불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다고. 그래서 등불이 있는 곳이면 나는 어디든지 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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