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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고향 / 허세욱
어머님이 홀로 되신 지 어언 2년이 다가온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포근한 고향도 때마다 봇짐을 싸듯이 자리를 옮기기 2년이 가까워온다.
고향이 고향으로 불리우는 내력은 많다. 누구는 자기가 출생한 곳을, 누구는 선영이 있는 곳을, 누구는 호적상의 본적을, 누구는 친족의 집단취락을 말하지만, 나에겐 부모가 계신 곳, 어머니가 계신 곳을 말한다. 어머니가 담그신 청국장 시루가 아랫목에 좌정한, 그런 발효된 메주 냄새 속에서 나는 고향을 물씬하게 느낀다. 본적은 있어도 고향이 없는 것은 메주 냄새에 밴 어머니의 퀴퀴한 안방이 없기 때문이다.
칠십 평생을 시골 지주 며느리요, 4대 봉사의 종부(宗婦)였던 어머님이 아버님을 여읜 뒤 홀연 정착을 마다하시고 무거운 노구를 이끌고 여기저기 자식 집을 찾아 때아닌 유랑을 했다. 실향민도 피난민도 아니면서, 자그마한 비닐 가방을 드시고, 그것도 겨우 천 원짜리 거무죽죽한 가방을.
내 집에 오시자마자, 까치집처럼 반공(半空)에 매달려 창을 열면 현기증을 느끼신다는 아파트가 싫어서, 남도 칠백 리 막둥이 자식집에 가시겠다고 당장 가실 채비를 하신다. 이른 아침 어머님이 거처하시는 방으로 건너가면 어느새 방을 치우시고는 동그마니 앉아 계신다. 들고 오셨던 가방은 옷매무새나 하듯이 단정하게 금방이라도 들고나설 수 있게 꾸리셨다. 그렇게 깔끔하게 정돈된 가방에서 나는 죄책과 슬픔을 느꼈다. 행여 역마벽으로 아침저녁 들락거리는 나의 소홀 때문인가? 아니면 여기도 저기도 정착할 곳이 못 된다는 황혼기의 적막이나 초조 때문일까?
어쩌다가 나는 그 보통이의 내역이 궁금해서 어머니 몰래 가방을 풀어보았다. 치마저고리 한두 벌에 속옷 몇 벌, 그리고 언젠가 내가 구해드린 강위산(强胃酸)약병, 눈에 익은 귤과 사과, 부스러기 된 과자, 껌, 사탕, 땟국이 절반쯤 밴 수건에 빗과 손거울이 한쪽으로 구겨져 있었다. 젊은이 같으면 큰 자개장에다 걸어둘 옷이 여기에 뭉쳐 있고, 울긋불긋 경대에 즐비할 세면도구가 여기에 끼어 있고, 분합에나 넣어야 할 상용약들이 여기서 구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간식으로 드린 과일과 과자를 여기에 모아 두신 것을 보았을 때 갑자기 축축해지는 눈언저리가 무겁다.
그리고 가장자리 주머니엔 언젠가 해드린 금비녀가 헝겊 조각에 말리어 있고, 새 며느리가 지어드렸을 새 버선이 셀로판 종이에 싼 채로 있고, 똘똘 말아둔 몇 장의 지폐도 보였다. 말하자면 옷장도 경대도 분합도 모두 여기 다목적 가방에 담겨 있는 셈이다. 어쩌면 어머님의 동산(動産) 전부가 아닐까?
일흔 하고도 삼 년이나 살다 얻은 동산이란 게 기껏해야 우리가 잠시동안 외국 나들이할 때 한 손에 추겨든 트렁크의 몇 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연륜과 함께 불어야 할 목록이거늘, 우리 어머니의 경우엔 헌신짝 하나라도 붙기는커녕, 갈수록 얄팍해지고 있다. 점차 적자(赤字)로 환원되는 과정이기에 정녕 무거운 것이 싫어서일까?
기실 그 비닐 가방 속 동산의 용처는 꼭 어머님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귤·껌·사탕 따위는 각지에 흩어져 사는 손자 손녀들에게 줄 선물로 충용될 것이 뻔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머님은 상부(喪夫)한 뒤 이 집의 대가모(大家母)에서 손자들의 보모로 전업된 셈이다. 일은 훨씬 번거롭고 정은 보다 분산되어야 했다. 갈 곳은 많아도 마음은 늘 공허했고, 한가한 시간은 많아도 늘 초조했다. 그 때마다 어머님은 저 봇짐을 싸들고 피곤한 여로에 훌쩍 오르셨으리라. 그렇다면 거기 비닐 가방에 포개진 두어 벌 치마저고리엔 주름마다 무거운 고적(孤寂)이 접혀 있는 거다.
더러 아버님 산소를 찾을라치면 어머님께선 못 견디게 흐느끼시느라 몸을 가누지 못했다. 2년 전 같으면 정말 낯설기만한 산기슭에서 지금은 고향집 안방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심중에 쌓인 설움을 털어놓고 계셨다. 어머님의 심경에도 모든 것을 호소할 수 있는 고향이 옮겨지고 있는 걸까? 언젠가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아버님 곁을 자기 고향으로 내심 짐작했고 또 벌써부터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걸까? 거기 돋아나는 쑥내음이나 향긋한 흙내음을 메주 냄새처럼 맡고 있는 걸까? 우리가 시종(始終)과 사생(死生)을 한 가지로 본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어머님 내심 속엔 이미 고향이 옮겨가고 있었다.
어제 아침 전주 막내동생 집으로 떠나는 어머님은 여느 때처럼 그 비닐 가방을 들고 떠나셨다. 말이야 서울이 갑갑해서 견딜 수 없다지만 기실 백일이 갓 넘은 손녀의 재롱을 보고 싶어서였고, 그보다는 선산 가까운데서 축축한 진흙을 밟고 싶어서가 아닐까?
오늘따라 새봄이 깊어갔다. 라디오에선 <고향의 봄>이 물결치지만 왠지 내가 뛰놀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한창일 고향집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은 잃어가고 있는 거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그곳엔 백양목 흰 두루마기 아버님도 세상을 뜨셨고, 메주를 끓이시던 어머님도 고향 아닌 타관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지난 가을에도 그러했었다. 어머님이 둘째아우를 따라 대구에 계셨을 때였다. 그 가을이 저무는 어느 날 나는 고향에 간다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는데 낯선 추풍령을 향하고 있었다.
때로는 전주가, 때로는 대구가, 때로는 태생지(胎生地)가 고향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막상 어머님이 내 집에 계실 때면 서울이 고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또 무슨 모순일까?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의류들이 거의 어머님의 손때 묻은 목면질(木綿質)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 알몸에 닿는 내의만이라도, 지금 우리 몸뚱이에 걸쳐진 의류 한 오라기의 실도 어머님이 주신 것은 없었다. 지금 우리 몸뚱이에 어머님의 손때가 무용해지듯이, 고향도 저만큼 먼 거리에서 때로는 그립고 때로는 아예 잊혀지고 만다.
그래도 나에겐 고향이 있다. 그런데 어머님 내심에 움직이고 있는 고향의 소재(所在)처럼, 나도 고향의 소재가 안개처럼 몽롱해지고 더러는 어머님의 소재를 따라 옮겨지고 있다. 어머님의 꾀죄죄한 봇짐을 따라 나의 목마른 향수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안산(案山)처럼 내곁에 앉아 있어도 꼬까옷 동년(童年)을 재현시켜주던 어머님이 자꾸만 먼길을 떠나시니 고향은 더구나 아물아물 멀어지고 여기저기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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