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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등 / 김은주

부흐고비 2019. 10. 27. 00:18

등 / 김은주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사람의 등에는 일 만 마디의 언어가 숨어 있다.

직립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산맥 같은 척추가 있어서 그런지 휜 등을 보고 있으면 참 깊고 무거워진다. 등과 대칭관계인 앞을 보면 눈이라는 창과 입이라는 발설의 기관이 있어 상대의 심중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있다. 한데 등은 아무런 신호체계도 갖추지 못했지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다. 돌아앉은 사람의 등줄기를 보고 있자면 상대방 삶의 이력이 한 눈에 다 보인다. 등은 단 한마디도 내게 직설화법으로 말해오지는 않지만 대화나 시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언어들을 내게 전해 준다. 등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상대가 나의 등을 바라봐 줄 뿐이지 스스로 내 등의 모습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서로 다른 세 남자의 등을 바라보고 섰다.

시침과 분침이 나란히 합일을 이룰 때 위패에 지방을 봉(封)하고 문을 열어 영가를 맞이한다. 싸늘한 밤공기를 안고 보이지 않는 기운 하나가 제상 앞에 와 앉는다. 기다리던 우리는 비로소 제사를 지낸다. 먼저 술잔을 친다. 나는 몇 발짝 뒤 주방께 에서 소반가득 맑은 물 한 사발 떠 놓고 마른 주걱을 적시고 섰다. 젯밥 올릴 준비를 끝내고 서있는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나란히 선 삼대(三代)의 뒷모습이다. 칠순을 넘긴 아버님의 구부정한 등과 한창 갈기를 휘날리며 튀어 오르는 남편의 등, 이제 막 물이 오를 때로 오른 아들 녀석 등이다. 같은 피붙이의 등인데도 다 다른 모습이다. 구부려 절을 한다. 굽은 아버님의 등은 납작한 가오리 마냥 쉽게 바닥에 밀착 된다. 굽은 등이 엎드리고서야 제대로 펴진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삶이 유해짐을 아시는 듯한 등이다. 그러나 남편의 등은 아직 설익다. 등짝이 아버님만큼 부드럽지 못하다. 절을 한답시고 엎드리긴 했지만 바닥으로부터 어설프게 들떠 있다. 앞으로의 세월이 저 풀기를 거둬 갈 것이다. 그 옆 아들 녀석의 등은 아예 엉덩이까지 들린 뻣뻣하기 이를 때 없는 모습이다.

술이 두어 순배 올려지고 도레미로 높낮이가 다른 등이 절하기를 멈추면 메밥을 퍼기 시작한다. 한 김 나간 밥솥을 일구지도 않고 고봉으로 정성을 다해 소담스레 밥그릇에 담는다. 그릇안보다 밖으로 더 솟아오른 밥을 주걱에 물을 묻혀가며 다독거린다. 밥그릇에 밥알 모이듯 식구들의 마음도 차지게 모여들길 바라며 따끈한 탕국까지 올리고 나면 얼추 내 소임은 끝이 난다. 아들 녀석은 무릎을 꿇고 할아버지가 내미는 술잔에 술을 따른다. 그때 잠시 옆모습을 본다. 아직은 풋 살구 같은 저 녀석도 언젠가는 거친 세상과 마주 할 날이 있으리라 거센 풍파에 갈고 갈리다 보면 할아버지의 등 모습을 반이라도 닮아 갈까 그 길이 멀기만 하다. 세월이 쌓이지 않고는 감히 할아버지의 등을 어찌 닮을 수 있으랴 다시 엎드린 아버님의 등이 숭고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물 묻은 손을 닦고 한복으로 갈아입는다. 제사가 진행 중인 대열에 와 두 손을 모으고 선다. 세 남자의 등과 나란히 서서 촛불에 일렁이는 옆모습을 바라본다. 세상의 모든 뒤는 앞만 못하다. 앞은 밝고 전진적이며 긍정적이다. 그에 반해 뒤는 퇴행적이며 습하다. 사람의 마음을 턱 없이 깊게 한다. 등을 바라보고 섰을 때의 수많은 생각들이 빛나는 눈을 보는 순간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세 남자가 한발 물러서고 내가 술잔을 친다. 병풍을 배경으로 타오르는 촛불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향불에 술잔을 돌리고 수저를 옮겨 놓는다. 바스락거리는 치마소리를 들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올린다. 이제는 뒤에선 세 남자가 내 등을 지켜보고 서있다. 보여 지는 내 등은 어떤 모습일까 중년의 고개를 넘어 선 볼품없는 아낙의 모습은 아닐까. 내심 든든하고 뚝심 있는 맏 종부의 모습이길 바래본다. 한 사람의 등을 보며 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절을 마저 끝내고 돌아설 즈음, 종일 음식준비로 고단한 내 등을 토닥이며 흘러내린 머리 몇 올 걷어 올려주는 손길이 있다. 누군가하고 돌아다보니 아버님이 웃고 계신다. 너무 많은 짐을 내 등에 올려놓으신 미안한 마음이 멋쩍은 웃음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서로의 등을 훤히 읽은 이 순간은 따로 말이 필요 없다. 무언의 기류가 서로를 넘나들며 고단한 마음자리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영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불을 끄고 잠시 물러나 있다. 머리를 조아린 세 남자의 등은 든든하고 환하다. 남자다움의 원천인 뱃심이 줄어들면서 아버님의 등을 받쳐주고 있는 엉덩이 살이 많이 빈약해진 것이 마음이 아플 뿐 두 남자는 그만하면 대들보로 손색이 없어 뵌다. 아들 녀석의 빳빳한 어깨죽지가 내게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다. 헛기침을 두어번하고 철상(撤床)을 한다. 지방을 들고 골목 밖으로 나서는 아버님의 뒤를 식구 모두 따라 나선다. 열여드레 달빛이 머리위에 쏟아진다. 지방에 불을 붙인다. 아버님은 흩어지려는 불길을 모아 하늘위로 쳐 올린다. 소지종이는 나비 떼처럼 날아오른다. 좀 더 높이 하늘로 올리려는 아버님의 손길이 분주하고 바쁘다. 생의 뒤안길로 접어들은 듯 쓸쓸하기만 하던 아버님의 등이 하늘로 치켜 올린 두 팔로인해 부채처럼 펼쳐진다. 헐렁해진 뒷춤과 굽은 등이 일순간 펴지며 달빛아래 환하다. 그만 하시길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식솔 모두 사라지는 영가를 향해 등 굽혀 인사를 드린다. 거나하게 식사를 마친 영가도 든든한 등을 보이며 표표히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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