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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 / 허효남

부흐고비 2019. 10. 27. 00:51

이 / 허효남


이를 바라본다. 온종일 조음을 도와 언어를 만들고 무언가를 씹고 삼키며 호흡하는 틈새에 그것은 자리하고 있다. 잇몸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서 가지런히 직립한 채 이는 무엇을 지키고 선 것일까. 아래와 위로 뻗어 서른 두 개의 비밀의 문처럼 견고히 선 이가 오늘은 내게 수많은 물음을 건네 온다.

모처럼 할아버지 댁을 찾은 날이다. 갓 젖니가 올라온 아들이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팔순을 넘긴 증조부가 팔 개월 된 증손자를 품은 것이다. 적막한 농가에 찾아든 아기는 온 식구들의 이목을 끄는 요술이라도 부려대는 것 같다. 낯가림 없이 넙죽넙죽 웃는 아들이 앙증스럽게 재롱을 곁들이자 집안에 웃음꽃이 활짝 번져난다. 아이를 품에 안은 할아버지도 함박웃음을 지으시는데, 순간 마음이 쩌릿해 왔다. 모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의 입 안에는 이가 거의 다 빠져버리고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를 바라본다. 증손자를 품에 안은 할아버지의 이와 증조부의 무릎을 차지한 아들의 이를 한꺼번에 보고 있다. 아기는 조약돌처럼 하얀 이가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하고, 할아버지는 쉰 옥수수 같은 누런 이 몇 개로 겨우 잇몸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함께 웃는데도 아들의 입은 입주 전의 빈집처럼 설렘이 있고, 할아버지의 입 안은 텅 빈 폐가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곧 쓰러질 낡은 집의 대문을 지키고 선 듯 할아버지의 모습이 애잔해 온다. 탄생과 사멸, 채움과 비움이란 등을 돌린 시간들이 아들과 할아버지의 이 사이로 쌓였다 다시 아득히 흩어져 간다.

이는 사람의 삶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생후 육 개월을 넘어 아이의 첫니가 올라오자 신기하기만 했다. 이렇게 연약한 아기의 어디에서 꼿꼿하고 단단한 이가 솟아올랐나 싶어 이유식을 먹이다가도 작은 치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핏덩이에서 벗어나 아이가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작도구로서 이가 본능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그 이상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아이의 삶에 다가온 작은 문과도 같았다.

사람이 자라고 성숙해 가는 삶의 리듬 속에는 이의 변화도 함께 한다. 새싹처럼 돋아난 젖니로 먹고 자라난 아이들은 입학 무렵이면 간니로 이갈이를 하게 된다. 이것은 학교라는 제도권 속으로의 삶의 이행이며, 나란히 맞붙은 치아처럼 조화롭게 사는 법을 익히는 시기로 도래하는 것이다. 작고 연약한 유치를 탈피하여 크고 견고한 영구치를 갖는 것 또한 성숙한 자립을 위해 거칠 또 하나의 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이를 바라본다. 지금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가 지금과 달리 위 아래로 가득했을 무렵이었다. 며칠째 흔들리는 내 이를 보고 반짇고리를 꺼내 오신 분도 할아버지였다. 발치할 이에 실을 동여맨 할아버지는 내게 온갖 혼을 빼는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셨다.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이마로 번쩍이는 유성이 날아들며 이가 뽑혀져 나왔다. 무언가 쑤욱 빠져나온 듯한 허전함과 가족들의 장난스럽게 지켜보던 눈빛들이 생생하기만 하다. 오늘처럼 환하게 웃던 그날의 할아버지는 가지런한 치아를 갖으며 반듯하게 꾸려질 내 미래를 염원했을 터이다. 헌 문을 닫고 새 문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삶의 문턱에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문지기처럼 내 곁에 서 계신 분이셨다.

생명으로 세상에 나서야 부여 받은 이는 생의 많은 문을 거치다 어느 때에 다다르면 다시 환원을 실행한다. 이생에서 주어진 것들은 이승에 모두 되돌리듯 이는 퇴화하는 신체 속에서 처음 세상에 올 때처럼 잇몸 사이를 차차 빠져나간다. 머물렀다 떠난 흔적을 하나씩 지워가며 또 다른 큰 문으로 향하기 위해 이가 먼저 마음 채비라도 하는 듯하다. 새순인 양 돋아나던 이가 울창한 한때를 보내고 공허한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질 무렵이면, 삶도 차차 겨울로 이르는 게 아닌가 싶다.

할아버지의 이를 바라본다. 이제 여남은 개만의 이로 겨우 삶을 버티고 선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신 것일까. 일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얼굴이 흙빛에 가깝고, 목의 굴곡과 힘줄 솟은 손마저 이제 땅의 형체를 닮았다. 석양이 든 육체로도 아직까지 밭일은 놓지 않고 계신다. 어쩌면 그것마저 내려놓으면 서른두 개의 문 끝자락에 더 가까이 가실까봐 두려운지도 알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다 가겠노라며, 어른들의 성화에도 끝까지 틀니를 거부하시던 할아버지다. 씹는 즐거움도, 미각도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 그저 나물국 한 그릇이면 족하다며 오늘 저녁에도 잇몸으로 간신히 식사를 하셨다.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우물거리며 식사를 하시는 할아버지와 막 돋아난 이로 오물거리며 이유식을 먹는 아들의 모습이 어찌 저리도 닮았을까 싶다. 할아버지는 출발선에서 종착선을 한 바퀴 끝까지 돌아 어쩌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음을 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서른두 개의 문을 관록으로 물들인 할아버지와 이제 막 그 초입에 들어선 아들, 또 그 두을 바라보고 선 내게로 불현듯 보이진 않는 끈 하나가 다가오는 듯하다. 어릴 적 내 이를 옭아매던 실보다 더 질기고 긴 끈은 우리 세 사람을 뜨겁게 묶어 주는 것만 같다. 핏줄로 흘러 온기로 달구어진 끈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비밀꾸러미 하나를 또다시 내 안으로 단단히 동여매게 만든다.

아들의 옹알이에 할아버지는 지금 웃으며 화답을 하고 계신다. 윤기 없는 껄껄한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할아버지가 골동품처럼 쭈글쭈글한 두 손을 내밀자 아이가 얼른 기어가 그 품 안에 안긴다. 이가 다 빠진 증조부와 이가 막 나기 시작하는 증손자 사이로 팔십 년이 넘는 세월의 궤적들이 모두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시작도 끝도 무색하기만 한 그 사이로 오늘은 하얀 웃음꽃만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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