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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 허효남
와드득, 달고 부드러운 유혹일수록 몸은 더욱 빠르게 반응한다. 음미해야 할 향도, 그윽하게 여길 깊이도 없기 때문일까. 깨물자마자 식도로 미끄러져 가는 초콜릿처럼 그렇게 쉽게 삼쳐 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맑고 투명한 것은 까맣게 포장을 하고, 혀끝에 쓴 것은 코코아로 덮어 한순간에 넘겨 버리고 싶은 시간들도 있다.
초콜릿을 먹는 날은 번번이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찾아오곤 했다. 오늘은 글을 보낸 지 한 달 남짓 소식이 없는, 어느 공모전 담당자에게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했다. 입상한 사람에게는 벌써 개별 소식이 닿았다는 목소리가 야속하게 들려왔다. 안타깝기도 하고 떨어지고도 확인까지 하는 내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음색이었다. 그를 면전에 둔 듯 낯이 달아올라 얼른 전화기를 놓았다.
초콜릿 포장을 뜯었다. 이왕이면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공간이 필요했다. 누가 볼세라 방문까지 꼭 꼭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위로식을 거행한다. 크고 넓적한 초콜릿을 입 안에 넣으며 괜찮다고, 떨어진 게 어디 이번 한 번뿐이냐며 스스로를 달래 준다. 글공부 시작한 게 언제인데 아직 이 모양이냐며, 질책하는 소리를 잠재우려고 더욱 와드득 초콜릿을 깨문다.
혀끝에서 그토록 달콤한 것이 빈속에는 어쩐지 쓰기만 하다. 허기진 가슴에는 쓰다 못해 아리다. 달콤한 것은 내 몸속을 흐르지만 그저 스쳐 지나갈 뿐 결코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행복하고 기쁜 순간들이 내 곁을 맴돌지만 나에게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혹여 이번에는 작은 문학상에라도 당선될까 기대해 보지만 늘 결과는 처참하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염려되어 하루 종일 전화기 옆을 서성이던 날에는 더더욱 비참한 심정으로 초콜릿을 찾게 된다.
올해 들어 벌써 몇 십 번이나 초콜릿을 뜯었다.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초콜릿처럼 이 순간도 삼키며 잊어버리자고, 또 패배의 순간조차 달콤한 기쁨으로 여길 줄 알아야 진정한 행운이 다가올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랜다. 유난히 씁쓸한 생각이 든 날이면 더욱 신경 써서 초콜릿을 골랐다. 예쁜 하트 모양에 속까지 먹음직스러운 시럽이 든 것을 골라 입안으로 넣으며, 자축 아닌 자축도 했다. "그래, 백 번은 떨어져야지. 백 번 실패하면 백 편의 글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이와 혀에 단것이 엉켜 붙을수록 기쁨의 그날은 더욱 멀게 느껴진다. 물컹하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초콜릿처럼 문단에 이름 석 자 올리지 못하고, 말 그대로 도전에 도전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칠전팔기는 이제 우습게 보이리만큼 숱한 패배 기록을 가진 나에게도 과연 그날이 오기나 할 것인가.
순식간에 녹아 버리고 마는 초콜릿이지만 먹고 또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은 왜일까. 어줍은 글 한 편 보내고 발표일까지 부푼 기대로 지낼 수 있는, 일시적인 환각이 즐거워서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당선되면 소감에는 어떻게 쓸까. 이 영광을 누구에게 전한다고 할까. 상금으로는 글을 더 많이 쓰도록 컴퓨터를 사야겠지. 아니면 어디서든 감상을 적을 수 있는 전자수첩이 좋을까. 상상의 나래를 활짝 폈다 착각의 구름 속에서 땅으로 떨어진 것을 알고는 금방 태도가 달라진다. 아무렇게나 글을 던진 무성의한 자신의 탓이라며 부끄러워한다. 이 정도의 글이 당선된다면 문학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자책도 해 본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가 썩을 줄 알면서도 단것을 찾아 먹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초콜릿은 달콤 씁쓸한 마력을 지닌 것이다. 잦은 실패에 실망은 하지만 도저히 포기는 되지 않아 글을 쓰고 또 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에 의심이 가리 정도지만, 펜을 놓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까닭에 밤새워 쓰고 또 쓴다. 붓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되려는지도, 어떻게 할 것이라는 기대도 잊어버린 채 우주 같은 책상 앞에 나는 오도카니 앉아 있을 뿐이다. 쓰는 일이 목적인지 눈 떠 있는 게 의도인지 잊어버릴 쯤에는 새하얗게 지새운 밤들이 오히려 꿈이 되어 버린다.
가끔은 초콜릿을 먹으며 기쁨의 맛을 상상해 본다. 성공은 어떤 향과 미감을 지녔을까. 잠깐 동안 달콤하고 말까, 아니면 오래도록 음미할 여운도 있는 것인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상상조차 힘든 행복의 맛은 오래도록 내게 꿈인 채로 남아 있었다. 문학소녀의 소망은 잊을 만하면 몸살처럼 되살아나서 도저히 버려둘 수가 없었다. 심연의 두레박으로 읽고 쓰는 부지런함이라도 길어 올려야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꿈을 실현하는 그 날이 오지 않더라도 삶과 글을 섞으며 사는 일에 주사위를 던져야만 했다.
내 작은 책상 앞에는 지금도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문구가 붙어져 있다. 처음 한두 번 실패할 때는 정말 큰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패에 꿈을 그리는 것이 몽상에 불과한가 의심이 되는 날이 더욱 늘어만 갔다. 실망이 큰 날이면 널어 둔 책과 원고를 정리해 넣으며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자신도 모르게 책을 펴고 펜을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이런 지긋지긋한 짝사랑이 또 어디 있겠나 싶어 넋두리를 하다 보니, 그 하소연마저 '초콜릿'이란 제목의 글로 엮어지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꿀처럼 단 행복을 꿈꾸며 고됨을 희망으로 여기는 자는 없을 것이다. 순간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내일이라는 또 다른 소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초콜릿을 먹어야 할 날이 내게는 얼마나 더 많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그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으리만큼 내 욕심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옹골찬 그 야심으로 초콜릿 먹는 날을 버텨 갈 수 있을 것이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순간이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이라 해도 나는 앞으로 쓰고 또 쓸 것이다. 입 안 가득한 충치가 영광의 상처로 남을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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