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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재봉틀 / 봉영희

부흐고비 2019. 10. 27. 19:36

재봉틀 / 봉영희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요즈음 친정에 자주 들리곤 한다. 갈 때마다 방에 놓여 있는 물건 하나가 내 시선을 거슬리게 한다. 방 문 앞에 거물처럼 버티고 있는 그 물건은 구닥다리 앉은뱅이 재봉틀이다. 한적한 곳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방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기 딱 알맞고 밖에서 보기도 여간 궁상스럽지 않다.

어머니는 그런 대로 건강하셨는데 얼마 전에 그 재봉틀 모서리에 부딪쳐 넘어지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고 그나마 걸으시던 걸음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셨다. 이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당신 자는 머리맡에 애지중지 그 물건을 두는 이유는 시집오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물품이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께서 맏딸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자라서 시집갈 때 가지고 갈 혼수라고 사오셨다니 무려 칠 십 평생 고락을 함께 나누며 지낸 친구 중의 친구인 셈이다.

어머니가 결혼하던 시절엔 재봉틀을 가지고 시집오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이어서 여인네들의 부러움을 산 귀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당신이 가져온 혼수품을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여겼다. 시집살이 고된 중에도 시아버지 고의적삼을 밤새 만들어 입히셨고 가솔들의 입성도 정성스레 지어 입히며 함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전쟁 중에 피난을 가면서도 어린 세 아이들과 먹을 식량을 지고 가는 것도 버거운데 무거운 재봉틀까지 가져간 걸 보면 애지중지 여기는 마음을 알고도 남을 듯하다. 피난을 갔다 집에 오니 숨겨뒀던 쌀을 누군가가 다 훔쳐 가버렸다고 한다. 그 것만 믿고 돌아왔는데 쌀 한톨 없어 식솔들이 굶주리게 되자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재봉틀 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거라도 팔아서 먹을 것을 마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가져갈 수 없었다며 참 모진 세상이었다고 한숨을 내뱉곤 하셨다.

그런 어려운 세월을 겪어 내고 식구들은 더 늘어났고 그 바람에 재봉틀은 자기를 남에게 넘기지 않은 주인 곁에서 한결 바빠졌다. 기성복이 나오기 시작해서 옷을 해 입을 일이 거의 없는데도 언제나 바늘은 돌아가고 관절염이 심해지자 앉아서 하기 쉽게 다리를 떼어내 개조를 해서 사용했다. 아마도 막내인 내가 어머니의 화려한 젊은 시절을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후로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나하나 결혼시켜 떠나보냈는데 뒤이어서 불행히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남은 집마저 남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보금자리를 잃고 땅도 물도 설은 타향으로 가게 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달래셨고, 제 식구들을 가지게 된 자식들은 멀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척 했다.

어머니는 외롭고 서럽고 분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재봉틀을 옆에 놓고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당신이 입던 모시 적삼을 뜯어서 자식들이 입을 수 있도록 조끼나 치마로 수선했다. 그리고 버리지도 않고 모아두었던 자투리 천들로 상보나 골무를 만들어서 자식들 집에 올 때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오셨다. 생각과는 달리 자식들은 그 선물 보따리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누가 요즘 세상에 그런 구닥다리를 입겠냐며 상보도 골무도 촌스럽다는 불평과 함께 궁상맞은 보따리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자식들 주겠다는 기쁨으로 퇴짜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가져온 것들이었다. 어렵사리 만들어 온 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행여나 당신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서둘러 짐을 챙겨 발걸음을 돌리곤 하셨다.

그 때는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해줄 건 없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던 간절한 마음이 서려있음을.

얼마 전에 아는 분께서 직접 만들었다며 상보를 선물로 주셨다. 그 상보를 받는 순간 어머니가 가져왔던 상보와 너무나 흡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에 뜻도 없이 싫어했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어머님이 주신 것처럼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그걸 받았다. 식탁에 두고 식구들이 늦게 오면 반찬을 덮어두는데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다.

철이 아직 들지 못한 나는 지난 시절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해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정작 당신은 눈도 어둡고 힘이 없어 바느질을 하시지 못한다. 다리도 없이 동그마니 몸체만 남아 있는 그 물건은 두꺼운 덮개로 씌워진 채 먼지만 켜켜이 쌓여 가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토록 아끼던 주인의 두 다리마저 성치 않게 만든 그야말로 밉상스런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걱정이 앞선 자식들은 이 애물을 어떻게 어머니에게서 떼어놓을까 궁리를 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매서운 눈으로, 원망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노려보는 걸로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신다. 한 낱 쇳덩어리에 지나지 않지만 재봉틀은 생사고락을 같이 한 분신 같은 존귀한 것임을 새삼 실감한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갈 때마다 함부로 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표현은 안하시지만 자식들 중에 누군가가 가져다가 당신이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 잘 보이는 데 두고 기름칠도 하고 옷도 만들고 했으면 좋겠다고 여기실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 같은 물건이라도 어울리지도 않는 그 구닥다리 미싱을 우리 집 안방에 가져다 놓을 용기는 내게도 없다. 쇠잔해지는 존재가 한없이 측은하고 훗날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모진 세월이 다 그 속에 묻어 있을 것 같아 선 듯 가져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음도 숨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나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걸 가져다가 삐걱거리는 손잡이를 돌려가며 자식들에게 줄 상보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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