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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밀번호 / 윤명희

부흐고비 2019. 10. 27. 19:43

비밀번호 / 윤명희


난감하다. 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술기 하나 없는 멀건 눈뜨고 집 앞에서 집을 잃을 판이다. 닫힌 문의 숫자판이 앵돌아앉은 낯선 여자의 모습이다. 금빛으로 치장한 그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꼬드긴다 해도 늙은이를 돌아봐 줄 것 같지가 않아 가까이 가던 손이 오그라든다. 낮에 카드키로 문 여는 방법을 어린아이 가르치듯이 했던 사위도, 손전화기에 카드키를 매달아 주며 꼭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딸도 이곳에 없다. 집도 동네도 낯설다.

절대 자식 신세는 지지 않겠다고 용쓰던 노인이다. 아쉬울 때마다 불러 댔더니 딸이 차라리 같이 살자고 한다. 기대기 시작하면 혼자 설 수 없을 것 같아 단칼에 잘랐다. 그랬던 노인이 나이 앞에 8자가 붙자 지금까지 잘 가지고 놀았던 손전화기도 리모컨도 반항을 시작했다. 세탁기가 물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불리어 온 딸에게, 넌지시 사는 공간이 다르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던졌다. 노인은 아래층에 살고 딸네는 위층에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저들은 한 달이나 늦게 오면서 덜컥 노인부터 옮겨버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또 마음이 변하리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다시 기억의 거푸집 스위치를 올려 수자 몇 개를 더듬듯이 눌러보지만 앵돌아앉은 그녀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다. 엄지손톱만한 네모 판을 갖다 대기만 해도 나긋하게 열어주던 문이다. 달걀 몇 알 사려고 가게에 다녀온 것밖에 없는데 이리 매정하게 밀어 낼 줄이야. 까무룩 한 골목에는 인기척마저 끊겼다. 등걸잠을 잘 수 없지 않은가. 다시 가게를 찾아 골목을 나섰지만 그 가게마저 보이지 않는다. 길고양이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발정 난 암컷의 울음소리가 골목을 채운다. 파랗게 핀 곰팡이 같은 피로가 온몸을 잠식했다.

집이 고픈 너울 쓴 거지같은 눈에 순찰 중이던 경찰이 들었다. 찾아 달라고는 했지만 노인이 기억하는 실마리는 없었다. 식탁 위에 두고 온 손전화기가 원망스러웠다. 1번만 누르면 다 해결 될 일이다. 1번이 딸인지 아들인지도 언뜻 기억나지 않는 노인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집 앞에서 보았던 도로명 주소의 마지막 숫자다. 경찰차에 올라타 범인을 찾듯이 골목을 헤맸다. 온 동네를 뒤지던 차가 멈췄다. 노인은 눈이 돌아갈 듯이 째려보는 도도한 문을 보자 경찰부터 앞세운다. 숫자 하나로 딸을 찾은 경찰은 번호판을 재빠르게 눌렀다. 앵돌아앉았던 문이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배꼽인사를 했다.

사람 차별을 하는 문을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쳐다보던 노인은 방에 들어서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가 축축하다. 비밀번호를 기억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거금을 들여 바꿨는데 그것 하나도 못 가지고 다니느냐고, 전화기에 메달린 카드키가 딸년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문에 있던 그년이나 이년이나 한통속 같다. 노인은 손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카드키는 왜 나한테 화풀이냐며 이불 위를 구르고, 노인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얼굴을 비벼댔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내 눈에, 마누라의 젖가슴조차 비밀번호를 모르면 손 댈 수 없는 시대가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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