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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무 / 이양하

부흐고비 2019. 10. 27. 20:12

나무 / 이양하1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 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날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신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재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 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 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 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도의 철인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아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 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1. 평안남도 강서 출생. 192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제삼고등학교(第三高等學校), 1930년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을 수료, 귀국하여 1934년에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1942년부터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영문학 관계 논문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5년에는 경성대학(京城大學) 문과 교수,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1951년 도미하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1953년에는 다시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언어학부의 마틴 교수와 함께 『한미사전(韓美辭典)』을 편찬하였다.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서리를 지냈다. 피천득(皮千得) 등과 함께 램(Lamb,C.)·베이컨(Bacon,F.) 등 정통적 유럽풍의 수필을 도입, 본격적 수필을 발표하였다. 이양하의 수필은 종래의 신변잡기적·주관적 제재에서 벗어나 생활인의 철학과 사색이 담긴 본격 수필을 시도하였으며, 「나무」(1964) 등의 작품은 이양하의 수필문학사상 주요한 업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송전풍경(松田風景)」(1939)·「내 차라리 한 마리의 부엉이가 되어」(1949)·「마음과 풍경」(1956)·「조지 호반에서」(1956)·「내가 어질다면」(1957)·「미국병정」(1957)·「삼면경(三面鏡)」(1958)·「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1958)·「조춘삼제(早春三題)」(1958)·「십년연정(十年戀情)」(1958)·「미스터 모리슨(Mr. Morison)」(1959) 등의 시와 「백조의 노래」(1943)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특히, 수필집 『이양하수필집』(1947)과 『나무』(1964)는 한국 현대수필문학사의 주요 업적으로 꼽히며, 『이양하수필집』에 수록된 「봄을 기다리는 마음」·「신록예찬」·「내가 만일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프루스트의 산문(散文)」·「페이터의 산문(散文)」 등은 대표적 수필로 널리 읽혀졌다. 영문학자로서 리처즈(Richards I.A.)의 『시와 과학』(1947)을 번역하여 이 땅에 리처즈의 문학 이론을 최초로 소개하는 한편, 권중휘(權重輝)와 함께 『포켓영한사전』(1954)을 펴내어 영미 문학 보급에 기여하였다. 이 밖에 「루소와 낭만주의」(1940, 서평)·「제임스 조이스」(1941) 등의 논문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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