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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글 / 이양하

부흐고비 2019. 10. 27. 20:20

글 / 이양하


글을 쓴 지 오래다. 그리고 여태까지 글이라고 쓴 것이 통틀어 2, 30편이나 될까. 코 흘리던 어린 시절부터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글을 배우고, 읽고, 가르치고, 반생을 순전히 글에 바쳐온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2, 30편이 글다운 글이라면― 아니 글다운 글이라면 2, 30편의 글로도 오히려 만족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나의 글이란 땅을 기는 글, 긴다느니보다 차라리 배밀이 하는 글이라 나는 여태까지 눈을 겨울의 서정시라 한 김진섭 씨의 한 줄을 써본 일도 없고, 한 줄의 보들레르, 한 줄의 말라르메는커녕,

대웅 성좌(大熊星座)
기웃이 도는데

하는 지용1의 한 줄을 써본 일도 없다.

원래 타고난 천품이 노둔한 탓이겠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애초부터 여간한 고통이 아니다. 혹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청하는 친구가 있어 어떻게 써볼까 허락하고 나면 난 그 순간부터 후회요, 신음이다. 약속한 기일이 닥쳐와 원고지를 펼쳐놓고 있으면 그땐 정말 진통이 시작된다. 원고지 처음 한두 줄을 메우는 것이 어떻게 힘드는 일인지― 생소한 바다에 뛰어들기도 이 이상은 두렵지 아니할 것이요, 헤엄쳐가야 할 바다도 이 열 줄 한 장의 원고지처럼은 망망해 보이지 아니 할 것이다.

어떻게 요행한 한두 줄을 써놓으면 그때는 시작이 절반이라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담배를 붙여 문다. 물론 담배를 붙여 물면 무슨 좋은 생각이 나겠지 하는 심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은 담배 한 개를 다 태우고 나도 좀체 이어지지 아니한다. 이번에는 옆에 있는 거울을 앞에 갖다놓고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혹 나르키소스의 미모나 가졌더라면 기쁨을 얻을 수 있으려만 삐뚤어진 임금(林檎)처럼 신통하지 않은 얼굴, 거기 무슨 영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글은 여전히 이어지지 않아 삐뚤어진 얼굴이나마 자꾸 들여다보고 있을 수밖에― 문득 삐죽 나온 코털이 보이고, 이마에 보기 흉한 여드름이 하나 눈에 뛴다. 이제 잠깐 글을 생각지 않아도 좋은 구실이 생겼다. 우선 가위를 찾아 코털을 자르고 다음엔 아플세라 조심조심 여드름을 짠다.

여드름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좀 아쉽다. 17, 8 때처럼 셀 수 없이 많아도 조금도 귀찮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구원은 의외의 방면에 있다. 이제 여드름 짜던 고놈의 손톱이 좀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 고놈의 손톱을 자르기로 하자. 까칫까칫한 고놈의 손톱만 잘라놓으면 글이 저절로 나올 것 같다. 그래 나는 다시 손톱을 깍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찬찬히 정성을 들여 깍고 나서는 이번에는 고루고루 줄질을 한다. 아마 내 손톱이 이런 때같이 예쁘게 깍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때라면 매니큐어리스트의 한 다스의 도구 일체를 갖다 맡겨도 하나하나 가려 쓰기가 번거롭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한없이 대들어서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부득이 다시 원고지를 끌어다놓고 이번에는 머리를 쥐어짠다. 쥐어짜면 서너 줄이 나아가고, 가다가는 한두 장도 나아가는 일이 있다. 그러노라면 으레 두서너 시간쯤은 잠깐에 가는 것이어서 그동안이면 옆방에서 친구의 타이프라이터 소리도 들려오게 될 것이요, 친구 찾아오는 손님과의 이야기 소리도 들려오게 될 것이요, 그보다 더 흔히는 나를 찾는 친구나 손님이 들어서게 된다. 손님이나 친구는 내가 원고지를 덮어놓고 돌아앉는 것을 주춤 미안 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는 이때처럼 찾아오는 친구와 손님을 반겨 맞는 일이 없다. 이제 아주 글을 동댕이쳐도 좋을 훌륭한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나의 글은 신문 하루의 짧은 글이나마 한 자리에서 쓰이는 법이 없다. 언제든지 두서너 번은 반드시, 이제 그 과정을 밟아야 한 편의 글 아닌 글이 된다. 그래 나는 돌아가는 윤전기 옆에 태연히 앉아 한편으로 옆에 있는 친구의 이야기에도 적당히 대꾸하여 가며 글을 쓰는 친구를 보거나 어떤 찻집에 잠깐 들어앉아 쾌히 한 편의 글을 써 던지곤 한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그것만으로라도 천재라 일컬어 마땅하게 생각되는 한편, 나의 노둔을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대체 글이란 무엇 때문에 쓰는 것일까. 나는 때때로 글을 써야 할 때마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이 애를 쓰고 써서 결국 글다운 글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 이러한 질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참말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또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일까. 둘러보니 이 방에만 하더라도 여기저기 쌓인 것이 한 2, 300권, 결코 많은 책은 아니나 이 많은 책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글을 쓴 것이었을까. 글 쓴 사람이 많고, 쓰인 글이 많되, 이점을 솔직하게 말해준 책과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 번은 밀른2의 에세이 가운데 '글 쓰는 기쁨' 이란 제목의 글이 있기에 좋아라 하고 한참 열중하여 읽고 나니, 실없는 친구, 글 쓰는 것이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매끔한 종이 위에 좋은 만년필로 글씨 끼적거리는 것이 재미난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다.

하기는 소위 문학개론이란 종류의 책에 문학이란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둥,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둥 하는 이야기가 없지 아니하나, 이런 소리는 애초부터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개중에는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사실에 있어서는 송아지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가르칠 수 없는 책이 더 많다. 그리고 또 글이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일이지만, 사람이란 아무리 생각하여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애써 글을 써서 남겨놓으리만큼 선량한 동물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아니한다.

그러면 참말로 글이란 무엇 때문에 쓰는 것일까. 여기 문득 한 10여년도 전에 글을 무엇 때문에 쓰느냐는 문제가 토의되던 대학의 영작문 교실이 생각난다. 대학 문학교실에서 이런 문제가 토의되었다 하면 어떤 사람은 웃을는지도 알지 모르겠다. 나 자신 한동안은 이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와서 생각하니 결코 웃을 일이 아니요, 그때 진개(陳開)되었던 학생들의 의견이야말로 도리어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할 만한 일을 거의 다 솔직하게 논의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 핵심을 붙잡고 그 정곡을 들어맞힌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떤 학생은 글은 돈을 위해 쓰는 것이라 하고, 어떤 학생은 할 것 없이 갑갑해 쓰는 것이라 하였다.

나의 의견은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해 쓴다는 것이었는데, 작문 선생이 그중 근사한 의견이라고 심판을 내려주어 적이 어깨가 올라갔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아직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던 때의 수작이요, 또 어떻게 말하면 약간의 기교 내지 위선이 있었던 것도 같아서 도저히 일당의 칭찬을 독점하여 마땅한 의견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하기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글 쓴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요, 글을 쓰는 데 순수한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내가 그때 생각하고 이야기하였던 셸리는 확실히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종달새 같이 노래하고 구름같이 자유스러웠던 셸리, 돈을 위하여 시를 썼다고는 생각이 되지 아니하고 독신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어린애를 꿈꾸는 애절한 글을 얽은 램3이 세상 명예를 위하여 그의 에세이를 썼다고는 믿어지지 아니한다. 가까운 예로 지용이 흥이 나면 때때로

꽃도 귀양 사는 곳

하고 무릎을 치면서 혼자 좋아하는데, 지용 역시 돈이나 명예를 위해 시를 쓰는 사람 같지는 아니하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성격과 인물을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마리오네트처럼 임의로 웃기고 울리고 살리고 죽이고 한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기쁨을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확실히 금을 주고 바꾸지 못할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 셰익스피어가 순전히 기쁨을 위하여 썼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망발이다. 원고료로 극장의 주를 사고, 고향에 땅을 장만하는 것이 셰익스피어가 그 많은 극을 쓴 주요한 목적의 하나였고, 괴테로 말하면 반시(半時)4 일대(一代)의 시인이라는 자부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속인의 일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가 가난하지 않고야 글을 쓰느냐?"

이 말이 보통 사람의 말이라면 귀 넘겨 들을 수도 있는 말이나 거짖없고 지혜있는 존슨 박사의 말이란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허술히는 생각 할 수 없는 말이다. 박사 자신 돌아간 어머니의 장비(葬費)를 얻기 위하여 4, 5일을 철야해가며 「라셀라스」5를 썼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순전히 조석의 끼니를 위하여, 굶주린 처자를 위하여, 또는 닥쳐오는 채귀(債鬼)를 물리치기 위하여 글을 쓴 사람도 찿으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아침 일어나 유명해진 것을 보았다는 바이런은 확실히 명예에 사로잡혀 쓴 혐의가 농후하고,

내 이야기에 화려한 곳 있어 님의 눈초리 빛날 때
나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그것이 영광인 줄 느꼈어라.

한 것을 보건대 바이런은 순전히 사랑하는 애인을 위하여 쓴 증거가 역연하다. 일찍이 화돈(花豚)이란 친구가 있어 우리 문단에 '신혼문학'(新婚文學)이란 재미있는 말을 제공한 일이 있으나 단순히 기경(奇警)을 겨눈 말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진실을 가졌다.

그렇다. 글이란 이 모든 것을 위해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돈을 위해 쓰기도 하고, 명예를 위해 쓰기도 하고, 기쁨을 위해 쓰기도 하고, 또 아무것도 할 것 없어 쓰기도 하고, 그러니 이제 이러한 글을 무엇 때문에 쓰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자연 해소되었다고 생각하여 무방할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는 지용이 우격다짐하는 바람에, 또 참말로 글이란 무엇 때문에 쓰는가를 나대로 한 번 가려보았으면 하는 데서였고, 지금은 몇 줄 아니하여 맛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 기쁘고, 내일 약간의 고료가 생겨 한두 친구 차 사줄수 있는 것이 기쁘고, 또 혹 이러한 글이나마 썼다고 이양하 놀고 있지 않다는 평이 생기면 염외의 다행이겠고, 만일 내게 애인이 있어 이 글을 재미나게 읽었노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을 것은 여기 다시 두말할 것도 없다.

  1. 鄭芝溶(1902~1950).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시인. [본문으로]
  2. Alan Alexander Milne(1882~1956). 아일랜드 출생의 영국극작가이자 수필가. [본문으로]
  3. Charles Lamb(1775~1834). 영국의 수필가. [본문으로]
  4. 아주 짧은 시간. [본문으로]
  5. 「The History of Rasselas,Prince of Abissinia」. 존슨이 쓴 교훈적 이야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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