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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미 / 김정화1
납작 엎드렸다. 옹색한 길바닥 좌판이면 어떤가. 널조각 자리가 왕후금침도 부럽지 않다. 캄캄한 얼음 창고 속에 쭈그리지 않아도 되고, 덕장에 걸리는 고행길에 오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이란 때로는 원치 않은 곳까지 흐르기도 한다. 내가 태평양 넓은 물에서 도심 변두리 골목시장까지 올 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한 뼘 길이의 손바닥만 한 나를 두고 사람들은 넙치(광어)와 견주기를 즐긴다. 눈의 방향으로 이름 내기를 하거나 모자란 생김새로 농을 친다. 눈이 오른쪽으로 쏠린 가자미와 왼편으로 몰린 광어를 구분하고자 좌광우도라는 대중어까지 만들어낸다. 그러나 단박에 우리를 호명하며 반색하는 이는 드물다. 뱃살에 코를 킁킁대거나 눈알을 꾹꾹 눌러가며 요리조리 갸웃거리는데 간택을 기다리노라면 심장이 바짝 마를 지경이다.
가자미는 도미 같은 귀족도 아니고 등살이 탄탄한 고등어처럼 풍채 좋은 호남자도 아니며, 늘씬한 몸매의 농어처럼 어류계의 팔등신도 아니다. 물론 갈치나 대구처럼 어물전 인기어는 더더욱 아니다. 면상이야 아귀나 물메기와 견주어도 어금버금하다. 하지만 어력만은 신화 못지않게 진귀하다. 가자밋과 물고기를 접어라고 일컫는데 가자미가 많이 난다 하여 한반도를 접역鰈域이라 불린 적도 있다. 《동의보감》에는 허虛를 보하고 동기同氣하는 음식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포츠담회담 만찬 때는 영국의 처칠 나리가 가자미튀김을 메인코스로 신청했을 만큼 황금기도 있었다.
한때 나는 '비목어比目魚'로도 불렸다. 한 눈이 다른 눈을 좇아간 고기라는 뜻이 될 것이다. 비比는 더불어 있다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한쪽 면이 없는 물고기를 반면어라 했는데 넙치와 가자미 역시 원래 한 마리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우가자미의 반대꼴인 좌넙치를 보면 저절로 몸이 기울게 된다. 비목동행比目同行이란 말을 생각해보라. 한쪽 면만 가진 몸을 붙여서 한몸처럼 다니는 것을. 이 얼마나 갸륵하고 정성스러운 일인가. 헤어져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운명을 함께하는 반쪽을 그대는 가져 보았는가.
우리를 가재미 혹은 납새미라고 부른다. 모양새에 따라 물가자미, 참가자미, 줄가자미로도 호명되지만 도달어鮡達魚라는 뜻의 도다리도 귀한 별칭이다. 또한 시골에서 부르는 까재미나 섬마을에서 지칭하는 딱괴이 또한 나의 애칭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마음이 가는 이름은 《자산어보》에 등재된 '소접'이다. 정약전 선생이야 '소접小鰈'이라 명명했지만 나는 나비 접 자를 붙여 '소접小蜨'이라 고쳐 읽고 싶다. 물고기의 작은 나비.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이름인가.
가자미를 외눈박이로 여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우리 눈이 처음부터 삐딱하게 한쪽으로 몰린 것은 아니다. 부화되었을 때는 여느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양측에 있었지만 위기 때마다 머리를 수그리는 습성이 배여 왼눈이 점차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한쪽에만 눈이 붙었으니 평생을 반쪽만 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사방을 아우를 수 있는 시야가 아니라도 몸을 돌려 다른 쪽을 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그러니 가자미눈이라는 말로써 남에게 심통이나 부리는 고약한 물고기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가자미는 태생적부터 온유한 심성을 지녔다. 물고기 중에서도 심약하기 이를 데 없어 갯지렁이나 새우를 삼키고도 무슨 큰 죄인인 된 듯 뻘바닥에 붙박여 지냈다. 하물며 어린이들도 멸치에게 맞아서 눈이 삐딱하게 돌아갔다고 얕본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생이란 타인의 눈으로 매겨지는 그림이 아닌가.
살다 보면 대접도 받고 호강도 하는 법.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에 몸값이 치솟고, 최고 횟감으로 범가자미를 시식한 미식가들의 쾌담이 라이벌 광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육지의 콧바람을 쐬기가 무섭게 이승을 하직한다면 싱겁고 억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뭍의 삶은 덤으로 얻은 세상이다. 제대로 된 생선 맛이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도다리쑥국으로 봄철 입맛을 돋우고, 탄력 있는 구이로 인간 식구들의 밥상을 지켜내고 있다. 양념 옷으로 성장盛粧한 가자미찜이나 매좁쌀밥을 삭힌 가자미식혜를 즐기지 않는다면 일류 미식가 반열에 오를 수 없다.
물고기를 문학 소재로 삼을 때 가자미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문어처럼 이름자에 글월 문文자가 없어도, 오징어 같이 먹물통을 지고 있지 않아도, 문학과 가자미의 인연은 깊다. 시인 백석은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라며 특히 친애하였다.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며 듬뿍 품어주었다. 오늘날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애송시가 되듯이 문인들께서 귀히 여겨주시니 어물전 인부들마저 작업 가자미를 '작가'라 불러주는 것이다. 뻘밭에 묻힌 삶도 견디다 보면 누군가 알아줄 날이 온다. 인생역전이 없다면 세상사 헛것이 아닌가.
더 바짝 몸을 낮추어본다. 마른 잎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도 길게 몸을 눕힌다. 때가 되면 지상의 모든 것이 아래로 엎드린다. 바닥의 삶이라도 어떤가. 생을 먼저 깨우쳤다고 위로하면 괜찮다. 이만하면 가히 됐다.
- 金貞花 경남 김해 출생,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 2006년 《수필과비평》 신인상, 2015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제19회 신곡문학상 본상, 제3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제19회 부산문학상 우수상. 월간 《문학도시》 편집장 역임. 수필집 《새에게는 길이 없다》, 《하얀 낙타》, 《가자미》 수필선집 《장미, 타다》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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