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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숨비소리 / 김미향

부흐고비 2019. 10. 27. 21:00

숨비소리 / 김미향
제1회 등대문학상 가작


잔잔한 물면을 뚫고 열정을 뿜어대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부레를 부풀려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사뭇 나를 붙들어 앉힌다. 시간조차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듯한 짙푸른 바다를 나는 미동도 없이 바라다본다. 태초의 바람으로 돌아가는 양 희푸른 바닷바람은 까마득한 기억을 건져 올린다.

어머니의 눈물은 바닷물보다 짰다. 언니, 오빠의 등록금 때문에 골목골목 다니며 남에게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일상은 언제나 고달파 보였다. 한뎃솥 앞에 앉아 치맛단을 뒤집어 눈가를 닦는 어머니의 그 모습에서 학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해녀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고향이기에 해변 여자들만의 본능이 내게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열다섯 살 먹은 소녀는 밤낮없이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 이끌리듯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바닷속은 신비했다. 물결에 몸을 부대끼는 해초가 수면을 향해 손을 내밀고, 아가미를 벌룽대며 삶을 헤쳐 나가는 잔고기들은 저들만의 길을 향해 지느러미를 놀려댔다. 어설픈 무자맥질은 시야를 흐려 놓았지만 바다의 속은 금세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바다 아래 펼쳐진 경이로움은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씨를 뿌리고 가꾸지 않았는데도 숱한 생명을 가꾸어 놓았다. 거두기만 하면 되는 수월한 농사였다. 해조류 사이를 파고드는 물고기처럼 나도 그 속을 헤집고 다니며 성게를 땄다. 망사리에 소복이 담긴 그것을 보니 며칠만 하면 수업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바위산을 뚫고 뿌리박은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자신이 생겼다. 바다가 만만해 보여 오늘은 아예 큰 테왁을 메고 집을 나섰다. 망설임 없이 곧장 잠수를 했다. 바위 사이로 물오른 성게와 통통하게 살이 붙은 전복이 눈에 띄었다. 욕심은 늘 실력을 앞서가는 것인지 몸보다 서둘러 과녁을 정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값비싼 전복과 사투를 벌였다. 제가 누리던 바다를 닮아서일까. 나와 한바탕 힘을 겨루고 나서야 생복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최대한 숨을 참으며 허겁지겁 그물로 된 밥그릇을 채워 나갔다. 심장이 터질 만큼 호흡이 가빠오면 그때서야 잽싸게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볼록한 그물망을 보니 더 큰 욕심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물 밑은 고요했다. 바다가 지어놓은 농사는 풍년이 든 농토처럼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곳간 문이 열렸으니 먼저 줍는 이가 임자였다. 나는 주인 없는 그것들을 마구 그러모았다. 당장의 욕심에 숨이 차는 것도 잊은 채 악착을 떨었다. 그 순간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통증 한 줄이 일었다. 눈알이 툭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다급히 수면으로 튀어 오르려는 그때 해초가 발목을 감고 있었음을 감지했다.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나를 집어 삼키려는 공포가 온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라 생각하니 억울함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물속에서도 눈물이 났다. 학비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눈물처럼 나도 그렇게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모든 게 마지막이라고 믿었다.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뿜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숨을 쉬어야 한다는 본능은 살아 있었나보다.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눈을 부릅떴다. 산이 보이고 뭍이 보이고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주던 초라한 내 집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오빠들과 좁은 마당에서 옥신각신 다투며 뛰어놀았던 기억들이 몽롱하게 되살아났다. 살아 있었다. 뭍으로 밀려난 소녀는 그제야 하늘을 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바다의 된맛은 죽음과 연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후 연민과 갈등으로 힘겨워졌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지났지만 나는 바다에서 현실을 먼저 배웠다. 온갖 짐을 떠안아야 했던 어머니와 달리 세월만 보내는 아버지의 무책임함이 더 원망스러웠다. 등골을 죄고 있는 끝이 말려 올라간 어머니의 윗도리와 수심 낀 얼굴을 볼 때면 숨이 턱까지 치밀던 그날의 악몽을 또다시 보곤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손에 희망을 쥐어주고 싶었고 가난 대신 분명 연필을 쥐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공납금 걱정에 어금니 물고 혼자 흐느적거리는 어머니의 숨비소리가 나를 더욱 옥죄어 왔다.

거대한 바다에 나는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안간힘조차 쓸 수없는 커다란 늪 같은 바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게 끌어당기는 두려움 속에 이를 앙당그려 물고 온몸을 떨어야 했다. 죽음이 도사리는 바다와 공납금을 내지 못하면 배울 수 없다는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뻗쳐올라 꿈속에서도 질펀하게 울어댔다. 나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고양이가 앙칼지게 울며 위협하는 악몽이 며칠을 이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무서운 꿈에서 깨어났다. 창문 사이로 드러나는 손바닥 만 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휑하니 걸쳐진 초승달을 보면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눈물이 났다. 용왕님의 허락 없이는 정녕 바다를 탐할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결국 비바리와의 짧은 만남은 아픔만을 간직한 채 고이 접어야 했다.

지친 걸음으로 그 바다에 다시 섰다. 내 유년의 놀이터였고 그 시절의 한 페이지가 숨어 있는 바다. 쪽빛 바다는 참 오랜 시간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멀어져간 한 소녀의 등 뒤에서 날마다 짜디짠 눈물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나의 바다는 열다섯의 숨 가쁜 고통과 저무는 해를 떠안고 서쪽 하늘로 곤두박질치는 죽음의 영토와도 같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닷가의 바위처럼 외롭게 쓰러져 있었던 그날의 나와는 달리 저 수면 위로 내려앉는 마흔의 안정된 숨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사랑했던 유년을 회상한다. 삼십 년이 훌쩍 넘도록 홀로 아픈 가슴을 지켜냈을 바다를 보며 나 스스로가 묶어놓은 쇠사슬을 비로소 풀어낸다. 눈물이 흐른다. 내가 바다를 보고 바다가 나를 보니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바다를 앞마당처럼 드나들고 바다의 서정을 거리낌 없이 보며 자라던 천진난만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수평선 위에 나의 평온한 부표를 심어 본다.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선 바위가 비뚤게 보이지 않고 오늘은 쉼표처럼 편안해 보인다.

해님이 퇴근을 서두른다. 멀리서 바다의 맥박처럼 파도가 밀려온다. 밀려드는 저 파도를 나는 온 몸으로 맞으리라. 두려움을 넘는다는 건 어쩌면 그 두려움 앞에 당당히 선다는 게 아닐까. 잠자고 있던 감각들이 깨어난다. 마음이 드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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