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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손등에 그려진 이력서 / 함순자

부흐고비 2019. 11. 29. 16:58

손등에 그려진 이력서 / 함순자1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잠이 들었는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는다. 밤을 새우는 동안 아픔은 고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멈추듯 더디 가는 긴 밤이었다. 잠들게 한 것은 약발인지 고른 숨소리가 편안하게 들린다.

수술 후에는 스물네 시간 동안 물 한모금도 금기(禁忌)다. 앞으로 여섯 시간은 더 견디어야 물을 먹는다. 물에 적신 거즈가 입술에 닿으면 열기로 금 새 마르고 오한과 신열이 반복 되는 중에도 내 손을 붙들고 긴 밤을 같이 새웠다. 입안이 소태처럼 쓰기는 나도 마찬가지건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잡아 주는 것뿐이다.

손등을 쓰다듬어본다. 나이는 손이 먼저 먹는다더니 여울의 조약돌처럼 매끈하던 손이 어느새 이렇게 겉늙고 쇠잔해 졌을까. 살 갗 밑으로 푸른 정맥이 도드라져 강줄기처럼 흐른다. 푸른 강은 팔목에서 시작되어 서너 가닥이 손가락 갈림길까지 내려와 머문다. 어슴푸레한 핏줄은 실개천처럼 흐르다가 큰 줄기와 합류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방향 없이 흩어진다. 이랑을 지은 주름이 비탈진 골짜기의 다랑논처럼 구불구불 손가락 마디를 넘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헤일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처리했던 손이 눈서리 맞은 겨울나무처럼 처연하다.

손이라고 다 같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르다. 남편은 글 쓰는 일이 노동이었다. 더구나 독특한 필체는 그를 대변해 주는 얼굴이었다. 퇴임 하는 날 까지 가장 힘들었을 손을 만져보니 회한(悔恨)이 밀려온다.

처음으로 발령 받은 지방근무지에서 그의 글씨체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앙부처로 발탁되어 영전하는 기쁨도 있었다. 손은 그가 가진 밑천이고 필체는 자본이었던 셈이다. 손등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가 이루어낸 것과 잃은 것, 추구하던 꿈까지도 새겨 놓은 듯이 역력히 떠오른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 앞에 강물처럼 조용히 살아오느라 힘겨워서 척추가 어긋났을까. 열정이 넘치던 청춘의 강도 고달프게 건너야 했고 남들은 쉽게 가는 지름길을 돌고 돌아 중년의 산을 넘기도 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서 낙심하고 받아 드릴 수 없는 결과에 주저앉기도 했다. 숨이 차게 뛰었는데 놓쳐버린 버스처럼 희망이 비켜 갈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럴 때 마다 이 손위에 내 손을 포개고 때로는 마주잡고 기도했던 시간들이 손등 마다마디에 숨어 있는 듯하다.

남편의 책상에 놓인 필갑에는 만년필이 몇 개 들어있다. 그 중에도 가장 오래되고 낡은 만년필을 부드러운 천으로 정갈하게 닦아서 써 보다가 제자리에 놓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 보다도 더 좋은 만년필이 있는데도 유난히 그 만년필에 애착을 갖는다. 버려도 집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 남다른 정을 갖는 내력을 알고 있는 터이라 또 향수에 젖어 옛날에 열심히 일하던 때를 떠올리나 보다 생각한다.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면서 상기된 얼굴로 황금색 만년필을 보여주었다. 금장으로 된 파카 만년필이었다. 케이스도 없고 종이에 돌돌 말은 것을 안쪽 호주머니에서 내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새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무실에 드나드는 중고품 상인한테 헐값에 샀지만 쓰는 데는 길들여진 것이 편하고 좋다고 했다. 빛나게 새것을 산 것도 아닌데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헌 것을 샀어도 얼굴 가득히 웃음일까 싶었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집에 살아도 단칸 셋집에 살다가 처음으로 작은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듯이 갖고 싶었던 금장 만년필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첫사랑처럼 아련한 것 같다. 사십여 년이 지나다보니 금색은 은색으로 바래졌다. 얄팍하고 버겁지 않아서 손안에 안기는 참한 만년필에 비하면 몸통도 굵고 투박해서 잡기도 불편해 보인다. 그런데도 곁에 두고 시간만 나면 만지작거리다가 긁적거린다. ‘이 만년필로 참 많이 썼지,’ 혼자 말처럼 흘린다. 오랜 세월 자신과 같이 동행한 낡은 만년필이 산 증인 같을 것이고 가까운 벗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항상 눈앞에 두고 자주 만지면서 옛날을 생각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마음을 누가 알까 싶다.

남편을 볼 때마다 곧은 성격과 직업이 참 조화를 이루었다는 생각을 한다. 천직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라는 인식이 가득한 사람이다. 실수 하지 않으려는 자제력은 구김살 없는 생활의 기본이 된 듯하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어떤 시대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사명감을 방패삼아 본분에서 이탈하지 않고 오직 한 길로만 달려온 그의 강직함이었다.

수술을 하기 까지 척추가 불편한데도 참고 잘 견디어 왔다. 허리가 약해진 원인도 앉아서만 일한 후유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앉은 자세가 늘 한 쪽으로 기울어 져서 평형이 유지 되지 못한 것이 발병의 시초였던 것이다.

푸른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겨울나무처럼 아픔도 걷어내고 일어나 힘차게 내리막길도 오르막길도 손잡고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동이 트는지 동창이 희부옇다. 그 사이 간호사가 주사를 놓고 갈 때 잠시 눈을 뜨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두벌잠이 들었다. 손이 따뜻하다.

  1. △경남 진주 출생 △《에에시21》등단 △에세이21 기획위원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남강문우회, 산영수필문학회, 한국기곧교작가협회 회원 △수필집『편지에 채워진 행복이야기』,『푸른 계절의 약속』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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