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부흐고비 2019. 11. 29. 07:19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밤새 곰팡이가 담쟁이넝쿨처럼 자라 있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인가. 며칠 사이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 듯했다. 벽지가 찢어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더니 미끈거리는 검은 습기가 묻어났다. 물티슈로 닦아내고 신문지로 문질렀다. 축축하던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 내렸고 그 뒤로 시멘트가 조금 드러났다. 그런데도 곰팡이가 피었던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릿해지고 옅어졌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여느 때처럼 거울로 가렸다. 절망처럼 급속도로 피어나던 곰팡이를, 그 벽을.

좁은 방에는 못이 딱 하나 박혀 있었다. 전에 살던 누군가가 박은 못이리라. 내가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못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못에 거울을 걸었다. 거울을 걸면 방이 더 넓어 보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혼잣말을 했지만 사실 거울 말고는 달리 벽에 걸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당시 내게는 계절별로 입을 서너 벌의 옷, 낡은 페이지가 나풀거리는 초라한 목록의 책, 보풀이 일어난 얇은 이불, 없어도 괜찮을 자질구레한 소지품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방에 이불을 펴고 누우면 한 사람이 겨우 더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 나는 그곳에서 아침이면 머리맡에서 쨍쨍 울리는 자명종 버튼을 꾹 누르고 형광등을 켰다. 아침이 되어도 한밤중과 다름없는 방에 있을 때면 늘 형광등을 켜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까 봐 두려웠다. 지하로 뻗은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숫자만 다른 똑같은 모양의 방들, 그중 하나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까 봐 형광등을 켰다. 끔벅거리던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면 벽에 걸린 거울이 가장 먼저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울에 잠시 얼굴을 비친 내 자신조차도 빛을 잃은 정물처럼 보였다.

벽에 걸린 거울에는 ‘축 개업’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가게를 차렸을 때 고모가 개업 선물로 가져와 가게에 걸었던 거울이었다. 가게는 처음에는 손님도 많고 매출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험 부족과 관리 실패로 점차 쇠락의 길로 들어섰으며 급기야 은행 빚만 잔뜩 지고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때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축 개업’ 문구가 새겨진 거울과 시든 국화가 심어진 화분들이 전부였다. 그 뒤로 가족이 모두 모여 살 수 있을만한 집을 찾지 못했기에 우리 가족은 각자 자신의 몸에 맞는 방을 찾아 나섰다. 그때 집을 나오면서 내가 챙긴 유일한 물건이 ‘축 개업’ 거울이었다.

아침이면 형광등을 켜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지상으로 뻗은 계단을 올라갔다. 당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는데 그중 하나가 옷 가게 점원이었다.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손님들의 옷을 찾아주고 입었던 옷을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그곳에서 옷을 판매하는 시간 외에 가장 많이 했던 일은 거울을 보는 것이었던 것 같다. 옷 가게였으니 사방에 거울이 있었다. 손님이 뜸한 시간이면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았다. ‘축 개업’ 거울과 다르게 옷 가게 거울 속에서 나는 정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거나 볼을 부풀리거나 입을 크게 벌리거나 잔뜩 인상을 써보았다. 그러다 손님이 들어오는 기척이 나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서 오세요, 라고 말했다.

‘축 개업’ 거울은 옷 가게에 있는 거울과는 달랐다. 옷 가게 거울은 사람을 밝고 환하고 날씬하게 비추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무척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축 개업’ 거울은 사람을 약간 어둡고 약간 일그러진 균형이 맞지 않은 모습으로 비추었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때는 몰랐는데 나 혼자 살던 방에 걸려 있던 거울은 분명 그렇게 보였다. 그 앞에 서면 어느새 나는 무척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축 개업’ 거울 앞에만 서면 나는 화장을 더 진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끔은 한낮에도 어둡던 방에서 거울 앞을 서성이던 내 모습에 소스라치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랐다. 그럴 때면 내가 금세라도 어둠에 희석되어 흩어져버릴 것만 같아 급하게 형광등을 켰다. 그리고 몇 번이고 덧칠해서 화장을 했다. 바깥에서 보면 무척 진한 화장이었을 텐데 그 거울 앞에서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창백해보였다.

장마가 오래 지속되자 하룻밤 사이에도 곰팡이가 무성한 속도로 자라났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시멘트벽은 축축해질 대로 축축해졌다. 손가락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벽지가 힘없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벽 가까이 놓아둔 책은 젖어서 페이지가 붙은 채 두꺼워졌고 옷마다 곰팡이 냄새가 배었다. 아무리 문지르고 닦아도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무서운 기세로 퍼져 나갔다. 작은 창을 통해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걸레로 곰팡이 꽃을 지우고 또 지웠다. 하지만 비는 점점 거세게 쏟아졌으며 급기야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하에 살던 창백한 사람들은 모두 망연한 얼굴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무언가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비는 더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모두 침묵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방은 살기 힘든 곳이 되어 있었다. 비가 휩쓸고 지난 자리마다 곰팡이 꽃이 가득 피어났다. 손을 대지 않아도 미끈거리는 검은 습기가 느껴졌다. 이사 오기 전보다 짐이 더 줄어든 나는 방을 떠나기 전, ‘축 개업’ 거울 앞에 섰다. 습기로 뿌옇게 흐려 거울의 기능을 상실한 거울이지만 가족과 연결된 유일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나는 거울을 떼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거울에 손을 댄 순간 곰팡이 꽃의 감촉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곰팡이 흔적을 가리려고 원래 자리에서 옮기지 않고 그대로 걸어둔 거울에는 뒷면부터 그 방에서 가장 무성한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숨을 쉬면 폐까지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거울을 일별한 뒤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장마는 끝나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었고 당연하게도 태양은 형광등보다 훨씬 눈부셨다. 공터마다 걸린 빨랫줄에는 젖은 이불이 무겁게 널려 있었다. 새로운 방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탁상 거울을 하나 샀다. 원래 모습 그대로 비추는 거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창백하지도 않고 별 볼일 없지도 않은 사람으로 보였다.

‘축 개업’ 거울은 아직도 어딘가에 걸려 있을까. 조각난 기억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그 앞에 서게 된다면 무언가를 가리려 애쓰지 말고 그저 밝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라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마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니.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등에 그려진 이력서 / 함순자  (0) 2019.11.29
어느 삼거리에서 / 이한얼  (0) 2019.11.29
옹기 시루 / 황진숙  (0) 2019.11.29
낮술 환영 / 최화경   (0) 2019.11.29
고흐에게 말 걸기 / 최화경  (0) 2019.11.2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