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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옹기 시루 / 황진숙

부흐고비 2019. 11. 29. 07:10

옹기 시루 / 황진숙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저라고 그리 생긴 게 좋기나 할까. 편평한 바닥과 넓은 아가리로 마냥 품고 싶었겠지. 동이 안의 물이 탐이 나 빗물을 받아 보기도 하였다. 가둬 둘 새 없이 빠져 나가버리는 물이 허허로웠다. 가려 주는 뚜껑 없이 구멍 난 바닥은 매나니의 삶이었다. 장독처럼 맛을 품는 건 언강생심이다. 술을 담아 논과 밭을 돌며 유유자적하는 자라병이 부럽기도 했을 터이다. 등에 업혀 다니는 허벅의 팔자는 단연 상팔자다. 여인네의 손길로 말간 얼굴을 되찾는 항아리를 바라만 봐야 했다. 함치르르 윤기 흐르는 단지들의 진열로 시루는 댕그라니 구석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장독대에 옹기 시루가 하나 있다. 땅을 향해 엎어져서 붙박이가 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시루에는 가랑잎과 거미줄이 한가로이 바람을 타고 있다. 모지라진 입술을 둘러친 이끼와 수화문手火紋 사이로 그어진 금은 정취를 자아낸다. 훑고 지나간 세월 속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풍화된 시루의 질감이 선연하다. 빛깔은 흐려졌지만 두루뭉술한 몸태나 후덕한 인심은 그대로다. 지금이라도 하얀 김을 내뿜는 백설기를 내놓을 것만 같다.

슬거워져 시루 옆에 쪼그려 앉는다. 나직이 호요바람이 묻어난다. 저를 억누르며 불의 시간에 몸을 절여서인가. 시커먼 연기에 그을리며 제 빛깔을 낸 탓인가. 거친 호흡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찰진 물성이 되고자 뚝메에 치이고, 께끼질에 깎이고, 메질을 당했던 순간들이 닳고 닳은 지문으로 박혀 있다. 방망이의 두드림을 이겨낸 바닥의 강고함은 시간의 파장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림질의 누름을 견뎌낸 기벽은 파고드는 진동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한 줌의 점토에서 시루가 되기까지 손끝에 맴도는 서사가 까끌하다. 그 꼿꼿한 치열함이, 짓눌릴수록 살아나는 당당함이 억척아낙네의 모습이다.

질긴 운명으로 엮어져 한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가고 있는 시루, 한 가문에 들어와 그 집안의 화석이 될 때까지 못 다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으랴. 금 가고 깨지면 미련 없이 내쳐지는 시루의 처지나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소박을 당한 할머니의 팔자가 무에 다르겠는가. 오매불망 파란 하늘 보기를 기다리며 뒤집혀 있던 시루의 시간들. 이제나 저제나 만주에 간 남편이 돌아오길 바랐던 할머니의 세월들. 생의 궁색함으로 무덤덤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 피차 매한가지였다.

할머니는 첫 결혼에서 소박을 당했다. 재취자리인 할아버지에게 시집 올 때 머리에 이고 온 게 옹기시루였다. 누대에 걸쳐 독자집안이었기에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까지 가슴 졸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수탉이 홰를 치면 할머니는 뒤란 장독대에서 치성을 드렸다. 집안에 경사나 우환이 생기면 시루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곤 하셨다. 일 년에 열 번의 제사가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떡을 하는 날에는 온 집안이 조용했다. 경건함이 부정을 물리친다는 할머니의 생각에서였다.

마당에 화덕이 준비되면 시루와 가마솥이 짝을 맞춰 앉는다. 시루 구멍을 메우기 위해 짚이나 삼, 칡껍질로 얼기설기 엮은 시루밑을 깐다. 그 위에 무명 보자기를 펴 놓는다. 디딜방아에 찧어 온 가루와 고물을 한 켜 한 켜 올리며 할머니는 날선 감정을 달래고 허물어지는 마음을 쌓았을 것이다. 켜켜이 깔아 놓은 떡가루의 층 위에 짚으로 만든 뚜껑을 덮고 시루번을 붙이며 메마른 시간들을 내려놓기도 했을 것이다. 공허함 속에 밀착되어 오는 가루들의 단층에 시루의 존재가 일깨워진다. 가마솥의 물이 끓기 시작하면 넣어 두었던 종지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 솥이 참지 못하고 내뿜는 증기를 시루바닥이 받아들인다.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수증기를 제 몸에 채워 넣는다. 잠시 눈에 보이고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성미인 수증기를 품어 생가루를 익힌다. 지긋이 기다려야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연기를 품을 수 있음에. 시간이 더해져야만 익어감에, 시루 안에는 기다림과 만남이 어우러지고, 설익음과 익음이 융화되어 익숙함으로 삶의 지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주에 인력거를 끌러 가신 할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길 염원했을 때도, 인민군에 끌려간 시동생의 안위를 기원했을 때도, 장손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도 할머니는 시루에 떡을 했다. 혼신을 다한 할머니의 영혼이 시루에 실리고 그 뜻이 하늘에 닿았을 때 고뇌의 비손은 숭고함으로 승화되었다.

시루가 떡을 쪄낼 수 있는 건 다른 옹기에는 없는 구멍 때문이다. 꽉 막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게 아닌, 스며드는 감정들이 만나 충만함으로 퍼져 나갈 수 있게 속을 내어준다. 그리하여 비감한 가슴에도 평온이 싹 틀 수 있게 한다. 완전히 메워지지 않음이어서 마음 한 자락 머금을 수 있고 들고 나는 바람 속에서 아로새겨진 바램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시루와 혼연일체가 되어 비숙원의 삶을 사신 할머니, 시댁으로 조용히 발걸음 하던 그 옛날처럼 생의 문을 닫던 어느 날도 소리 없이 돌아가셨다. 이제는 소용이 다한 시루에 더 이상 떡을 하는 일은 없어졌다. 시루 안에 들인 햇살과 바람의 노래가 아스라해지고 머물던 삶의 흔적들이 희미해지면서 할머니의 세월도 그렇게 여물고 있었다.

흘러온 세월만큼 시루가 주는 잔잔한 기억이 장독대에 은은히 머문다. 수 십 년간 숱하게 들고 났을 호흡에 손길이 더해진 시루는 그저 술명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흙 속에서 핀 연꽃처럼 가마 속에서 피어난 시루, 깊은 속내에 스며든 생의 노래가 아득하게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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