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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
제9회 2018 천강문학상 대상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일상을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식욕을 느끼거나, 좋다거나 불쾌하다거나, 위험을 감지하거나, 모든 생물체에 있어 후각은 먹이를 찾을 때 혹은 포식자를 피할 때 그리고 짝을 정할 때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했다.

아직도 드문드문 고즈넉한 옛 풍경의 모서리들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무채색 계절에 홀로 반짝이는 샛노란 모과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숨구멍이 열리고 새콤한 향기를 토해낸다. 겨울로 들어서면서 해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아져 퇴근 무렵이면 벌써 주위가 어둑신하다. 어둠이 깔려 사방에 적막이 깃들면 산동네 공기는 금방 싸늘해진다.

동네어귀에 차를 주차하고 고샅길로 들어서면 어디서 따라오는지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알싸하게 만든다. 고문서를 거풍하듯 잘 마른 장작 타는 냇내다. 보일러 시설뿐인 내 집에서 나는 냄새일리는 없고 아마도 옆집 누군가 군불을 지피는 모양이다. 모닥불처럼 냄새가 따뜻하다.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낯선 상황에 내 볼일이 아니라는 듯 애써 외면하지만 그것쯤 아랑곳없이 발걸음마다 곰삭은 기억들이 밟혀온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선다. 혼자 사는 집에 반기는 불빛 하나 없는 대신 옆집의 연기냄새가 무단 침입해 자기영역 표시하는 짐승들처럼 만연체로 차지하고 있다. 별빛 총총한 밤의 청취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작 냇내와 어우러져 달밤의 정감을 한껏 부추긴다. 귀 기울이면 어느 LP판 턴테이블에서 야상곡 멜로디가 댓잎 사이로 은은하게 흘러나올 것 같다. 지그프리트 바르헤트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첼로와 섬세하고 잔잔한 피아노 반주는 어떨까. 아궁이 앞에 군불을 지피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연주자의 그림자처럼 불현듯 눈앞에 그려진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른다. 시커먼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찬 불길이 성난 황소 뿔처럼 울끈불끈하다. 탁, 탁, 탁, 장작 타는 소리. 불땀 좋은 마른 장작들이 죽비 터는 소리를 내며 나이테마다 옹이진 경전을 읽어내고 있다. 몸에 흰 연기를 칭칭 감고 방고래를 향해 기세 좋게 타들어가는 불길이 마치 젊은 시절 열정과 욕망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던 날들을 보는 것 같다.

기운차게 타오르던 장작불이 어느 정도 사위어들면 부지깽이를 뒤적거리며 멍하니 불꽃을 바라본다. 삶의 아픔과 시름도 순간 잊어버리고 무념무상에 빠져들 것 같은 궁극의 순간이다. 이글거리는 황금빛 불꽃이 고흐의 인상주의 그림처럼 사뭇 몽환적이다. 빨갛게 불덩어리를 안은 장작개비 사이로 자기도 모르게 삶의 미련과 후회의 탄식을 내뱉기도 하고 까닭을 알 수없는 연민과 그리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등짝은 바깥 찬바람에 서늘한데 불꽃을 맞댄 얼굴은 매운 고추라도 삼킨 듯 화끈거린다.

군불 때는 일이 쉽지는 않다. 요령을 제대로 터득하려면 눈물깨나 흘려야 한다. 나무마다 특성을 잘 알아야 하고 바짝 마른 가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매운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기도 한다. 불을 빨리 키워볼 욕심에 한꺼번에 장작을 많이 밀어 넣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바람과 불길이 잘 들도록 숨구멍을 틔어 놓는 공간이 없었기에 오히려 따뜻한 불씨가 죽고만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공들이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지나고 보면 이해와 관용, 배려와 여유가 늘 아쉬웠다.

저 불길이 온 방안의 구들장을 뜨끈하게 데울 것이다. 바깥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쳐도 뜨거운 제 몸의 온기를 지닌 구들방은 밤새 식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날은 저녁 무렵부터 내리던 함박눈이 밤늦도록 소복이 쌓여가고 있었다. 긴 겨울밤을 톡톡 분지르며 바느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이불을 걷어차며 단잠에 빠진 어린 자식들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문풍지가 떨릴 때마다 아랫목에 앙구어놓은 밥주발에 걱정스레 눈길을 주곤 하였다. 엄동설한도 꾸벅대는 길고 긴 겨울밤, 아마도 달팽이 같은 시간을 아껴먹던 평온 같은 것이 아니었나싶다. 일터에서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고흐의 자화상처럼 동여맨 목도리에 새파랗게 얼어붙은 노동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런 날은 어린 눈에도 아버지란 존재를, 누군가의 어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해본 것 같다. 굳은 손을 부비며 아랫목 구들장에 추위를 녹이는 아버지의 등 그림자를 보면서 비로소 오늘밤에도 가계도 하나가 완성된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날은 왠지 늦잠을 자고 싶었다. 뒹굴뒹굴, 혼자 뒤늦게 눈을 뜨면 창호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은 한없이 따사로웠고 군불 땐 방 안은 마치 누군가의 품에 꼭 안기어 숨이 막히도록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폐증에 빠진 겨울이다.

올해는 유달리 춥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외로움이 가중된 모양이다. 저 옆집의 연기냄새는 누구를 위해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일까. 가족이거나,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풍찬노숙 같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자신을 위해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아궁이로 달려가 불을 지피는 그 모습은 아버지일수도, 오래된 친구일수도, 아니면 효심 많은 자식일수도 있다. 저녁안개처럼 온 동네에 내려앉은 냇내가 ‘관계’에 대한 목마름처럼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군불을 지핀 적이 있을까. 한 사람의 가슴이라도 제대로 따뜻하게 데워본 적이 있었을까. 따뜻한 온돌도, 화로도, 연탄불도 되지 못해 아직도 내 구들장은 냉돌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덜 마른 나무로 방을 데우겠다고 불쏘시개만 아궁이에 쉴 새 없이 넣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은 꾸역꾸역 역류하는 매캐한 검은 연기처럼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감사하다며 왜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이해관계 없이, 희생하고 있다는 군소리 없이 열의와 정성을 다해본 적이 있었던가. 내게 좋은 것, 편한 것,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숨겨진 삶의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외면했던 것은 아닌가. 나의 안녕과 평안만을 바라며 불목을 찾아 등짝을 지지기만 했을 뿐 찬바람 부는 바깥에서 들뜬 마음으로 방구들을 데우는 역할은 하지 못했던 지난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소중한 일이다. 가족이거나 친구나 연인일수도 있겠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어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거나 아니면 상처받은 기억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 그리움은 뒤늦은 깨달음일수도, 속죄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힘으로 오늘을 반성하며 사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세상살이가 자신만만해서, 내 잘못은 없다며 스스로 당당해서, 그래서 되돌아볼 그리움도 없이 사는 삶은 빈 수수깡처럼 얼마나 쓸쓸한 일일까. 그때 그 일은 순전히 내 잘못이었던 것처럼, 후회와 원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따스한 아랫목의 온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볼 일이다.

온기를 느끼고 온기를 주는 것.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로 경계를 넘어 온정이 생겨나고, “고생했어!” 한마디로 힘들었던 고통마저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잘 데워진 구들장처럼 삶이란 그 뜨끈한 온기로 추운 겨울을 함께 헤쳐 나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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