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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업경 / 박흥일

부흐고비 2019. 12. 10. 13:48

업경 / 박흥일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명부冥府로 출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명부란 말만 들어도 다리가 얼어붙지만, 어차피 이승을 이별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에 마음을 다잡아 명부에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며 명부전의 대청마루에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우락부락한 판관이 사천왕의 눈알을 부라리며 높다란 보좌에 앉아서 흘깃 내려다보았다. 오방색 조끼적삼을 헐렁하게 풀어헤친 판관은 밤낮으로 밀려드는 영혼들을 심판하느라 지쳐보였고, 맥없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관은 초면 영혼의 심문 메뉴얼에 따라 "어느 골에 사는 뉘신지요. 그리고 무슨 일로 이렇게 서둘러 오셨나요."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나는 악업惡業만 까발려서 얼렁뚱땅하는 판관도 많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판관의 입을 주시하였다. 판관은 판결문을 낭독하지 않고 나를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불꽃 문양이 조각된 거울을 보여주었다. 업경業鏡이었다. 업경은 생전의 과보果補가 낱낱이 되비치는 거울이다. 판관은 내가 동네 친구들을 꼬드겨 도깨비불을 잡겠노라 꽹과리를 쳐대며 부슬비 내리는 공동묘지에서 밤을 지새운 황당한 사건, 단골 대폿집 마당의 전화번호와 제때 갚지 않았던 외상 술값 청구서, 영어 단어 외우기가 너무 힘들어 염소에게 억지로 단어장을 뜯어 먹이다가 누나에게 혼나는 모습,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낱낱이 저장되어 있는 업경을 보여주었다.

판관은 내가 쌓은 선업의 두루마리와 내가 지은 악업의 두루마리를 업칭業秤에 올렸다. 판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인턴 저승사자의 업경판독에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당신은 개똥밭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환생의 기쁨을 후회 없이 누리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오세요. 요즈음 옷을 벗고 한 일은 옷을 입고 나면 깡그리 까먹는 허깨비들, '#Me Too'를 유발하는 주책바가지들이 득실거립니다. 게다가 선택적 기억상실증을 빙자하는 망나니들의 재심청구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업경 평가를 무기한 미루기로 했습니다."

판관은 긴 한숨을 쉬었다. "명부전이 너무 비좁습니다. '#Me Too'를 외칠 때마다 마당은 북새통이 됩니다. 엊그제는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한량이 성추행 고발을 당했답니다. 그저께는 꼴값하는 배우가, 사이비 교수가 학생들을 희롱했답니다. 어저께는 연극계의 대부라고 자처하는 늑대가 대명천지를 활보하다가 포획됐답니다. 일전에는 나라 살림을 봐달라고 뽑아준 믿었던 도끼가 위력을 휘둘러 그 짓거리를 했다 안 했다를 번복하다가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노라 발뺌했답니다. 그 뻔지레한 변명을 들은 팔도의 노송들이 뿌리를 뽑아 흔들며 발끈했답니다. 그들이 구린내를 속이며 숨어든다면 당장 날짐승과 들짐승을 데리고 숲을 떠나겠노라고 청기와집 대문에 방을 붙였답니다."

해무가 출렁이는 이른 아침에 천둥치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판관은 들뜬 목소리로 내가 '명부발전위원회'의 지구별 대표로 뽑힌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죄는 지은 대로, 덕은 쌓은 대로'라고 쓴 주렴을 걸어두고 공정한 선악 감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정오에 각자의 과보평가서를 전송하여 명부 판관을 빙자한 '악업털기' 사기범들을 검거하고 있단다.

명부 체험관 신축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아기 코끼리 벨라 이야기'에 나오는 영혼 심판법을 벤치마킹하겠단다. 신축 명부전은 양수리의 '두물머리'와 삼랑진의 '뒷기미'가 낙점될 가능성이 높다 했다. 명부에 호출된 영혼은 반드시 두 개의 강줄기가 흐르는 계곡에 홀로 서 있게 하고, 가까운 강줄기의 수면에는 그들이 살아온 행적을 비춰주고, 맞은편 강줄기의 수면에는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여 정성껏 살았다면 누릴 수 있었던 성취를 비춰주어, 그들이 보낸 허송세월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는 최적지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란다.

판관은 호언장담하였다. '두 강줄기 수면에 똑같은 아름다운 인생의 참모습이 떠오르게 하려면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를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업경을 비춰보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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