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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달의 등 / 박월수

부흐고비 2019. 12. 8. 23:41

달의 등 / 박월수



내가 사는 곳은 대구의 서쪽 끝이다. 달의 등을 뜻하는 이곳을 태어나고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유년의 기억 속에 달의 등은 조용한 소읍이었다. 나지막한 집들과 너른 들을 둘러친 앞산 줄기가 전부였다. 밤이 되면 앞산 마루에 뜬 달이 평평하게 생긴 소읍을 고루 비추었다. 달의 등짝처럼 펑퍼짐한 마을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디서부터 인사할 채비를 해야 할 지 항상 헛갈렸다. 거치적거릴 것 없이 훤하다는 것이 주는 불편함은 늘 같은 곳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앞 서 걷는 이의 뒤통수가 눈에 익은 사람이면 숫기 없는 나는 가던 걸음을 늦추어야 했다.

그 속에서 자라던 유년을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가 있다. 내가 아홉 살이 될 무렵 날마다 조금씩 허리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자꾸만 기우는 허리 탓에 나도 모르게 한 손은 허리를 짚고 다녔다. 만날 보는 아버지는 그런 딸이 멋을 부린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잖게 여겼다. 어느 날 부터인가 달등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쪽으로 기운 허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띈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 손을 붙들고 날마다 대구를 오갔다. 이른 봄에 시작된 병원 나들이는 그 봄이 저물 때 까지 이어졌다. 달의 등짝을 닮은 소읍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더 넓은 도시의 경이로움에 흠뻑 빠졌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온갖 종류의 간판들은 신기했다, 갈수록 등이 아파왔지만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처럼 한 쪽으로 기운 허리가 열두 시 십오 분을 지나고 있었다. 병이 깊어 식욕을 잃은 나는 뼈만 남았고 딸의 병명을 모르는 아버지의 시름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나는 더 이상 도시 나들이에 들뜨지 않게 되었다.

병은 소문을 내야 낫는다고 했다. 달등 마을 사람들은 부러 내 이야길 흘리고 다녔다. 떠돌던 소문은 앞산 자락의 오디가 익을 즈음 내 병을 낫게 해 줄 병원을 찾아주었다. 아버지의 골 깊은 주름이 펴진 것도 잠시였다. 여기저기 살펴보던 의사는 내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꼽추가 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개울가에 살고 있는 등 굽은 아주머니가 생각나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얼핏 훔쳐 본 아버지의 얼굴은 타작마당에서 막걸리 두어 잔을 걸친 후처럼 꽃도미 빛깔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속을 다 비우는 관장을 하고 전신 엑스레이를 찍을 때였다. 겁먹은 내 곁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턱까지 떨며 차가운 기계 위에 엎드릴 때 아버지는 딱 한마디를 하셨다. “참아라.” 그 말엔 온갖 힘든 것도 이겨내야 할 당연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리고 모로 눕고 바로 눕고 수없이 많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서 곁에 있는 아버지덕분에 든든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이 꼽추가 될 뻔 했다는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팥알 크기의 곪은 상처가 등뼈를 갉아 먹는 중이라고 했다. 달의 등짝을 닮은 동네가 나를 훤히 드러내 놓지 않았다면 팥알만 한 상처는 콩알만 해 지고 결국 내 뼈는 삭아 내렸을 터였다. 곱사등이가 될 뻔한 나를 구한 건 펑퍼짐해서 마뜩잖았던 달등 마을과 어린 내 눈에 한 없이 높고 멀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등이었다.

평생을 농군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에 모를 내지 못한 적이 그때였다. 나는 무던히도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하루에 한 번 맞는 주사는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눈 질끈 감고나면 이미 주사 바늘은 빠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끼니때 마다 먹어야 하는 한 움큼의 알약은 무척 곤혹스러웠다. 아버지가 아무리 박하사탕을 들고 기다려도 물을 삼키고 나면 입 안 가득 알약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점점 커졌고 하는 수 없이 잘게 씹어서 삼키곤 했는데 그 쓴 맛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아버지 몰래 약을 버리다가 들킨 날은 안 죽을 만큼 혼이 났다. 그 약이 거의 뼈만 남은 나를 지탱해 줄 영양제와 칼슘이란 걸 알았어도 철없던 내게는 안중에 없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내 몸의 치수를 재어갔다. 달등 마을에 장이 서던 날 어머니를 따라가 편물 옷을 맞추어 본 경험이 있어 나는 은근히 기대가 컸었다. 몇 날 후 병원에서는 희한한 옷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입히려고 했다. 굽은 등을 바르게 고정시켜주는 의료기구라고 했다. 어린 나는 갑자기 한 번 입으면 영원히 벗지 못할 것 같은 아득한 예감이 들었다. 입지 않으려고 우겼다. 얼마나 울면서 앙버티었는지 앙상한 팔에 멍이 들었다. 잠결에도 훌쩍거리다가 한옥으로 지어진 병실 밖 마당에서 땅 꺼질듯 이어지는 한숨소리를 들었다. 살그머니 내다보니 허름한 달빛에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이튿날 나는 두 말 않고 그 옷을 입었다. 어깨에 걸치고 양쪽 사타구니에 가죽 끈을 묶는 방식이어서 혼자서는 입을 수 없었다. 멀미를 하는 어머니 대신에 늘 곁에 있던 아버지가 거들어 주었다.

달등 마을로 돌아가 뛰놀고 싶어 몸살을 앓을 즈음 내 등의 상처도 아물었다. 병원을 나서는 내게 의사는 꼭 세 해 동안은 의료용 옷을 입어야 된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도대체 그 옷을 입고는 딱지를 칠 수도, 말 타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자주 그 옷을 벗어놓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아버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자라는 아이의 몸을 억지로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나를 자전거에 태운 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곤 했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서 학교에 다니는 나를 친구들은 몹시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등이 지금에서야 간절히 생각 키운다. 혹시라도 딸의 등에 남아 있을 팥알 크기의 상처를 때워 주기 위해 쫀득한 수구레편을 특히 잘 만드셨던 아버지는 몇 해 전 달등 마을을 등지셨다.

달의 등을 닮은 이곳을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건 아마 내 속에 잠재된 아버지의 등에 대한 따스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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