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2월 / 서성남

부흐고비 2019. 12. 9. 08:55

2월 / 서성남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새벽 새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달이 2월이다. 어느 달보다 많이 지저귄다. 그 소리는 영하의 날씨를 뚫고 맑기도 하다.

집수리 중인 까치들은 둥지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상대를 부른다, 높지 않고 부드럽다. 여럿이 토론하듯 날카롭게 짖는 것과는 달리 온화하다. 다른 새들도 서로 부르는 소리에 교태가 있다. 숲의 악사인 청딱따구리 수컷의 연주를 자주 듣는 달도 2월이다. 속 빈 나무를 부리로 두드려대는 음은 드럼 소리 같기도, 대나무 통에 구슬이 구르는 듯도 하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눈앞을 가로지르던 직박구리도 날갯짓과 소리가 한결 순하다.

냇물 소리가 가장 정겨운 달이 2월이다. 채 녹지 않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물, 아기 옹알이 같고 엄마의 자장가 같다. 물이 잠깐 멈춘 자리에는 성급한 개구리가 어느새 까만 알을 낳았다. 냇물 소리에 겨울이 흘러간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강은 윤슬로 눈부시다. 물 속 고기들은 기지개를 켜며 차고 오를 준비를 할 것이다.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으로 이름을 짓는 인디언이 2월은 ‘물고기가 뛰노는 달’이라고도 부른다지 않은가. 강 위를 나는 철새 무리도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바다 속도 한층 분주해질 것이다.

2월의 빈 들판은 색이 바래 황량해 보인다. 누렇게 마른 풀잎, 반짝이는 얼음, 스산한 바람, 옅은 햇살, 겉으로는 생명활동을 멈추고 편안히 쉬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움직임이 느껴진다. 햇볕에 땅이 반응하고 바람에도 그냥 있지 않는다. 한 겹의 볕도 더 받으려고 꿈틀대고 서릿발 사이로 한 자락의 바람도 더 마시려 손을 내밀고 숨을 크게 쉬는 것 같다.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언덕 위로는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산도 얼핏 황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숲은 무성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마른 가지만 허공을 지킨다. 키 큰 나무의 묵묵한 모습, 아버지를 닮았다. 침묵하듯 조용한 숲이지만 뿌리는 수분을 저어 올리느라 바쁠 것이다. 낙엽 속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 지난여름 몇 개의 잎을 달고 떨어진 참나무거위벌레도 도토리 속에서 겨울을 나고 있을 것이다. 숲은 침잠하고 번성하는 우주의 섭리를 되풀이하느라 잠시 정중동일 뿐이다.

매몰차던 바람도 갈수록 순해진다. 문풍지의 떨림도 잦아든다. 설핏 남쪽 바다 냄새도 묻어난다. 2월의 바람은 연을 날게 한다. 얼레의 실을 풀며 보리밭을 힘껏 달리면 매단 연은 일순간 바람 타고 공중을 난다. 먼 하늘에 아득히 나부끼는 연은 꿈이다. 2월의 바람은 꿈을 실어온다. 바람의 신 영등할매도 이제 지상으로 내려올 채비 중일 게다. 어머니는 장독에 맑은 물을 올리고 두 손을 모을 것이다.

2월은 24절기의 시작인 입춘이 있는 달이다. 대한 다음이라 봄이 시작된다기보다는 준비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년 농사의 씨앗을 고르는 달도 2월이다. 지난해 받아 놓은 씨앗들을 꺼내 겨우내 얼거나 훼손되지 않았는지 살핀다. 바꿀 것은 바꾼다. 한해 식탁을 준비하는 장을 담그는 달도 2월이다.

두 번째 절기인 우수는 대개 19일 무렵에 있다. 중국에서는 우수 지난 10일에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그 다음 5일에는 초목에 싹이 튼다고 한다. 아파트 앞 단풍나무 가지에도 어느새 푸른빛이 감돈다.

하순 들어 기온이 영상으로 이어지지만, 가끔 꽃샘추위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때 추위는 앙탈부리는 막냇동생 같아 밉지가 않다.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두꺼운 겨울옷을 꺼내 갈무리를 잘하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2월은 찬 기운 속에서도 뭔가 준비하느라 엎드리고 있는 형색이다. 달리기 시합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전신의 힘을 가다듬고 숨을 멈춘 긴장한 모습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선 채 비상하기 위해 출력을 높이는 모양새, 튜닝을 끝내고 지휘자의 손끝을 기다리는 관현악단 같다. 2월은 숨죽이고 있지만 뛰쳐나갈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달이다.

신호가 나기 전 생존을 위해 규칙을 어기는 꽃이 있다. 키 큰 풀이 자라면 설 곳을 잃고 마는 작은 들꽃들, 신이 베푼 자비일지 모른다. 종족번식을 윤허해주는 것이리라. 복수초, 노루귀, 안전부채, 변산바람꽃……. 예쁜 꽃들이 핀다. 봄의 전령이다.

인생에도 2월이 있을 것이다. 일 년 농사의 씨앗을 살피고 장을 담그며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인생을 벼르는 2월이 있을 것이다.

이제 2월 말. 내일이면 ‘탕’ 신호와 함께 눈부신 생명이 다투어 피어날 것이다.


<촌평>


‘간절기(間節期)’라는 말이 있다.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가는 시기를 말한다. 그 간절기 중에 가장 동(動)적인 것이 2월이 아닐까 싶다. 정(靜)의 계절인 겨울. 그러나 그것은 정(靜)이라기보다는 동(動)을 위한 휴식이고 준비라 할 수 있다. 2월은 그 준비의 마지막 단계, 리허설 무대이다. 그 숨은 움직임을 화자는 시각, 청각, 촉각을 총동원한, 예민한 촉수로 잡아낸다. 대상수필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가 대상의 묘사에 너무 많은 것들을 끌어들이거나 과장된 비유로 되레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 글은 섬세한 감성을 바탕으로 하여, 세심한 관찰과 통찰을 저친 적확한 묘사로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 이혜연 -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업경 / 박흥일  (0) 2019.12.10
모탕 / 김순경  (0) 2019.12.09
달의 등 / 박월수   (0) 2019.12.08
환상통 / 박월수  (0) 2019.12.08
청학(靑鶴) / 박월수  (0) 2019.12.0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