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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뒷모습 / 탁현수

부흐고비 2019. 12. 10. 14:00

뒷모습 / 탁현수1


앞이 꽉 막힌 아파트에 살다 보니 매일 앞 동의 흉물스런 시멘트벽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평소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도 마음이라도 울적한 날엔 더욱더 답답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주말이면 들리는 시골집 역시 마을의 뒤쪽이라서 그곳에서도 많은 집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낸다.

온갖 생물들이 동면에 들어간 초겨울, 두어 해를 비워두어서 스산하기 그지없는 시골집에 처음 입주를 했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풍경은 볼품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시골이긴 하지만 시멘트블록 담들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앞마당에 갖가지 나무들을 심어서 삭막한 그 모습들을 가려버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바삐 지냈다.

그런데 봄을 보내고 여름, 가을, 겨울을 차례대로 맞이하다 보니 내 생각이 많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앞집에서 내게 보여주는 뒷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봄내 담 너머로 하얗고 깨끗한 배꽃과 자두꽃이 눈부시게 피어 가슴 설레게 하더니, 여름에는 접시꽃과 해바라기가 정열을 토해냈고, 가을에는 주렁주렁 달린 붉은 감들이 시선을 붙잡아 한나절씩 툇마루에 앉아 있게 했다. 겨울 역시 빈 가지로 바람을 맞으며 새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겨울나무와 함께 많은 사색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 후부터 나는 앞집, 아니 온 동네의 다정한 뒷모습들에 홀딱 반해서 지낸다. 해질녘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는 모습도 좋고, 바람 부는 날에는 '우우우---' 흔들리는 대숲의 합창 소리도 아름다운 선율로 들린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면서 내 의식에는 많은 변화가 오게 되었다. 앞마당 가꿀 생각에 뒤뜰은 방치해 두었던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뒷집으로 이어지는 담 앞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개나리를 심어서 병아리처럼 노란 꽃이 가득 피어나게 하고, 등나무 넝쿨을 올려 보라빛 등불을 황홀하게 밝히는가 하면, 여름 동안 시원한 그늘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창 앞에서 보면 자기 집 정원 같이 좋다는 뒷집 안주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뒤태가 참 고와요"하고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뒤편 산으로 이어지는 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그곳은 자연과 위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배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주로 채소를 가꾸고 울타리의 잡초들도 그냥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하는 편이다.

요즈음은 집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뒷모습이 늘 궁금하다. 외출을 할 때에도 남편에게 "괜찮아요?"하고 앞을 보이는 게 아니라 뒤돌아 보이곤 하는 습관이 생겼다. 은연중에 타인들의 뒷모습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 사람 저 사람 살피다 보니 마음의 진실은 앞모습 보다 뒷모습에 훨씬 정확하게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앞모습은 여러 가지 다양한 표정으로 감출 수도 있지만 뒷모습은 거짓이 없다는 것도---.

오랫동안 헤어진 정인(情人)을 그려 볼 때도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먼저 떠오를 때가 많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할머니만 해도 꿈에서 나타나시면 어딘가를 향해 떠나시는 뒷모습이 잘 보이곤 한다. 돌아가신 분이지만 생전의 모습처럼 걸음걸이가 기품이 있으셔서 꿈에 뵌 날은 종일 기분이 좋다.

영화 같은 곳에서도 이별을 앞에 둔 두 연인을 그릴 때에는 앞모습 보다 뒷모습을 많이 조명해 준다. 괴로움에 싸여 심리상태가 불안한 사람의 모습도 고뇌하는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주는걸 보면 그만큼 뒷모습은 그 사람을 정직하게 나타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찰에 들를 때마다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의 뒤쪽을 자주 바라본다.

'후광'

분명히 뒤에서 피어나지만 바라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눈부신 아름다움. 부처님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 거룩하게 사신 분들에게서는 후광이 발한다. 그것을 보면 뒷모습은 일부러 가꾸기 보다는 앞모습을 위해 곱게 살아가면 덤으로 아름다워 지는 것 같다.

모든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게 되는 것은 개개인이 현세에서 살아낸 자취이다. 그 자취는 후광이 발하듯이 앞모습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라져 가는 뒷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닐까.

  1. 탁현수: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대한문학(계간) 편집장. 남도수필 문학회 회장역임. 호남대학교 출강. 광산 문화학교 수필창작반 강사. YMCA 논술강사(10년). 수비문학상, 광산문학상 수상. 수필집: ‘한 걸음만 느리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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