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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거기/ 이동민

부흐고비 2019. 12. 11. 15:09

거기/ 이동민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거기.”

거실에서 모임을 알리는 우편물을 찾으려 탁자 위의 종이들을 들썩거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우편물 어디 있어?’라는 말에 대한 아내의 대답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내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외출을 서두르면서 자동차 키를 찾을 때도, 신문을 보다가 메모할 일이 있어서 볼펜을 찾을 때도, 심지어는 세면대 위에 놓여 있었던 치약을 찾을 때도 나는 ‘어디 있어?’라고 소리친다. 아내가 말하는 ‘거기’는 자동차 키도, 볼펜도, 치약도 들어 있는 마법의 상자이다. ‘거기’에는 우리 집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모두 들어 있다. 상자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깝다.

‘거기’라는 말만 듣고 화장대 위에서, 또는 장롱의 서랍을 열어서 물건을 찾아내는 내가 용하기도 하다. 아내가 ‘거기’라고 할 때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한다. ‘거기’는 언어가 아니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신비로운 끈이다. 가섭의 미소는 말로서는 풀어낼 수 없는 소통의 길이다. 미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서실에 가려고 여느 날처럼 현관문을 나서면서 “오늘은 우리 결혼한 날인데.” 하였다. 별다른 감정도 없이 무심히 건네는 말이었다. “12월 16일이잖아.” 나도 지나가는 말처럼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떠난 이 집을 둘이서 지킨 지도 어언 10년이 가깝다. 어제도, 오늘도 아내는 현관문을 나섰고, 나는 버릇처럼 컴퓨터 앞에 앉는다. 자료도 찾아보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요즘의 일과이다.

해가 기울 녘이 되자 아침에 결혼일임을 말하던 아내가 생각났다. 전화를 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바깥에서 할까?”라고 한 내 말도 무덤덤했지만, “그러지 뭐.” 하는 아내의 대답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수성 못가에 있는 식당에 갔다. 창문 밖의 수성 못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면서 일렁이는 물결이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 결혼 전에 이곳 호반 커피숍에 더러 들렀지.” 했다. 옛날을 생각하니 마음이 젊어졌다. 둘러보니 예전의 그곳처럼 풋풋함이 넘치는 사람들만 자리를 메우고 있다. 아내는 그들 때문인지 주름이 늘어난 얼굴에 신경을 썼다. 그러고 보니 40년보다 더 오래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온 이야기가 얼굴의 주름에 새겨져 있다.

무슨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티 없이 맑은 얼굴을 맞대고 연신 속살거리는 젊은이의 표정이 무척 달콤해 보인다. 우리는 겨우 몇 마디의 말만 건네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얼핏 쳐다본 아내의 얼굴에는 세월이 만든 흔적들이 가득하다. 흔적에는 오랫동안 새긴 ‘거기’라는 단어도 자리를 잡고 있다. ‘거기’라는 말은 수십 년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두 사람만이 만들어 왔고, 두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말의 소리가 아닌 색깔로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마법이 담겨 있다.

젊었던 날에도 출근 시간에 쫓기면서 ‘어디 있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거기’라는 대답을 들으면 ‘거기가 어딘데?’라며 짜증을 내곤 했다. 아내는 내게 잽싼 걸음으로 와서 ‘여기 있잖아.’라며 부은 얼굴을 하고 내뱉었다. 여기와 거기는 말의 뜻만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의 길이가 다르다. 여기는 모호함이 없다. 말하는 이가 바로 곁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다 보니 듣는 사람도 헷갈리지 않는다. ‘여기’는 의사의 소통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일어난다. 그런데도 아내가 ‘여기 있잖아.’ 하는 말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아내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예전에 왜, 아이들과 거기 갔잖아.” 하였다. 젊은 날에 아이를 데리고 들렀던 어린이 놀이터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어린이 놀이터….” “그래.” 다시 말을 끊고 우리는 세월을 가로질러 먼 옛날로 여행을 했다. ‘여기’에서 ‘거기’까지 살아온 길이 기억 속에서 가물거린다. 영감탱이가 되도록 둘이서 만들어 온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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