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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부흐고비 2019. 12. 15. 09:40

단추를 달며 / 정해경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서랍 속으로 들어간 스웨터도 있고 바지주머니가 터져 동전이 빠진다는 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 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여태 보지 못했던 모습을 이제야 본다는 비아냥거림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제껏 내가 이 정도로 밴댕이속인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불려나온 반짇고리도 더없이 추레해 보인다. 색동비단을 덧씌워 만든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 결혼할 때 직장 동료가 선물로 준 것이다. 촌스러울 만큼 화려해서 들고 올까말까 망설였는데 침모처럼 따라와 나와 함께한지 수십 년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얼룩이 지고 헝겊 고리단추도 많이 헐거워졌다. 화려했기에 더 초라해진 반짇고리. 울컥 측은한 마음이 물결처럼 인다. 남대문시장에서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가위와 흰색, 검은색 실꾸리 두 개를 사던 날이 어제인 듯 떠오른다. 그때는 뭔가를 사들이는 것이 살림의 시작인 것처럼 사 나르기에 열을 올렸다. 반짇고리에 담는 건 일단 그거면 될 것 같았다.

뚜껑을 연다. 뚜껑안쪽에 붙어있는 바늘꽂이에 바늘이 빽빽하게 꽂혀있다. 이 많은 바늘은 다 어디서 왔을까.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것부터 이불을 꿰매는 큰바늘까지, 그 중에 녹이 슨 것도 있으니 꽤 오래 사용하지 않았나 보다. 반짇고리 안의 공간을 2층으로 나눈 플라스틱 받침의 한쪽 귀퉁이가 깨진 건 언제였을까. 사용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모르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일이 그것뿐이랴 생각하며 모아 논 단추 중에서 셔츠에 달려있는 것과 같은 것 하나를 골라 집어낸다.

받침을 들어내니 온갖 실들이 그 밑에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큰 실꾸리 두 개와 자잘한 색색의 실꾸리들. 한 뼘쯤 실이 풀려 다른 것에 엉기기도 하고 통에서 빠져나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도 있다. 사람도 살림도 자꾸 얽혀드는 것이 세월의 흔적인가. 이 많은 색실을 사용할 만큼 우리 집에 가지각색의 옷이 있기나 한 건지. 다 풀린 자국이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여태껏 나만 모르고 살았던 내 모습이 반짇고리에 담겨있는 것 같아 민망해진다.

흰색 큰 실꾸리에서 실을 풀어 적당한 길이로 자른다. 가위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아직도 서슬 퍼런 가위가 반갑지 않다. 마치 몇 십 년이 지나도 꼬장꼬장한 시어미처럼 시누이처럼 아니 내 안에 있는 꼬부라진 성질머리처럼.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무딘 듯 온화해질 수 있다면 흐르는 세월에 그저 몸과 마음을 맡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일 텐데.

아직도 단추 다는 일이 내키지 않은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비로소 옷과 단추와 실과 바늘을 손안에 쥔다. 옷과 단추를 바늘과 실이 이어준다. 단추가 달렸던 자리에 바늘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다. 말끔했던 옷에 바늘자국도 상처일까 싶어 구멍이 있던 자리에 집중하며 바늘을 넣고 뺀다. 또다시 실이 풀리지 않도록 옷섶의 두께만큼 실을 홀쳐매고 옷 안쪽으로 바늘을 빼 매듭을 묶는다. 다시 매듭이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바짝 당겨 실을 끊어낸다. 옷섶이 울지는 않는지 단추를 채워 옷을 들어본다. 언제 단추가 떨어졌었던가. 감쪽같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와 가슴을 오가는 사이 실과 바늘이 바뀌며 스웨터의 솔기도 아물어지고 바지 속주머니도 메워졌다. 내친 김에 다림질도 해둔다. 그동안 모인 바지가 몇 개이고 셔츠가 몇 장인지 한동안 입고 나갈 옷에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 통장에 잔액이 불어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하다.

낡았지만 아직은 내 옆에 더 있어줘야 할 침모, 반짇고리도 잠시 재정비에 들어간다. 바늘을 가지런히 다시 꼽고 실꾸리의 실들을 잘 갈무리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후 뚜껑을 덮는다.

산다는 것이 어찌 늘 단정하기만 할까. 나도 모르는 사이 단추가 떨어지고 바지 단이 뜯어지고 점퍼의 지퍼가 밑에서부터 벌어지기도 한다. 단추를 달고 단을 꿰매고 지퍼를 고쳐 손질하고 나면 새 옷을 산 것과는 다른 산뜻한 느낌이 있다. 주위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는 것일까. 한껏 구겨졌던 내 마음도 어느 정도 반듯하게 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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