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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딸꾹질 / 전미란

부흐고비 2019. 12. 15. 09:50

딸꾹질 / 전미란


# 1.
“우리는 살면서 많은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던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이런 불편한 진실은 우리 주변 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지금부터 두 손님과 점원의 상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방송멘트) TV웃음방송 한 꼭지를 보면서 내 안의 불편한 진실이 시치미와 능청을 떨며 키득거린다. 치밀하게 계산된 각본이 만들어낸 웃음인 줄 알면서도 폭소로 가벼워지고 싶다. 얼마 전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던 일을 개그프로 멘트를 빌려와 직접 연출해 보자면 이렇다.

# 2.
몇 걸음만 옮겨도 각종 브랜드 커피숍으로 즐비한 골목에 가격파괴 커피를 팔고 있는 찻집이 생겼다. 그곳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꽉 들어차있다. 이렇게 꽃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틀림없이 자리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하려는 순간 같이 간 친구가 화장실을 찾아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나는 빈자리를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일단 카운터에 커피값을 맡기고 자리부터 잡아 앉았다. 그리고 화장실에 다녀온 친구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곧이어 점원이 커피와 함께 거스름돈을 쟁반에 받쳐 와서 내게 묻는다.
“손님, 아까 제게 만 원 주셨죠?”
“아녜요, 오천 원 주었는데요.”
그때 마주 앉은 친구가
“잘 생각해 봐…….”
한다.

긴가민가해진 내 표정을 점원이 어떻게 읽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두말없이 거스름돈 칠천 원 중 이천 원을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는 거스름돈을 얼른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커피가 두 잔에 삼천 원이니 내가 낸 돈이 만 원이었다면 잔돈 칠천 원을 받아야 맞고, 오천 원을 냈다면 이천 원만 거슬러 받으면 맞다.

잠시 후, 그 뻔한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셈을 정확하게 다시 해 볼 기회를 갖지 않고 잔돈 오천 원을 슬그머니 가방에 넣었다.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방송멘트)

# 3.
나는 더 많이 받게 된 거스름돈 앞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애드리브를 치고 만 것이다. 세상의 질서에 길들여진 ‘정직’이라는 대본에는 전혀 없는 장면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냈다. 변명 같지만 그때 나는 어떤 트릭도 없이 단지 말이 불필요했고, 점원과 다시 셈하기가 불편했으므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쩍 넘어간 것뿐이었다.

그런데 달콤쌉쌀한 것을 홀짝거릴 때마다 잘못 삼킨 계산이 딸꾹질처럼 올라왔다. ‘아, 그 순간 나, 왜 그랬을까…….’ 참으려 할수록 딸꾹질 간격은 짧아지고 소리는 무장 커진다. ‘딸꾹질아, 그만 멈춰다오.’는 안타깝게도 뒤늦게 찾아왔다. 치장된 겉모습이 나의 전부인 양 스스로 허상에 이미 속아 넘어간 후라 진실을 뱉어낼 수도 없다.

어쨌든, 이 상황을 차르륵 털고 다시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때 순수하게 셈하던 주판이 그리워진다.

# 4.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야생의 능구렁이가 배회하고 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오십 년 묵은 노련한 타짜 같은 구렁이가 동네슈퍼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 당황스럽게 하더니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는 찻집에서 나타난 것이다.

TV에 시선을 고정한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부린 채 시치미와 능청을 떨며 키득거리는데도 딸꾹질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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