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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결 / 노정희

부흐고비 2020. 1. 19. 10:17

결 / 노정희


결이 고왔다. 오종종한 나이테가 눈길을 끄는 앙증스런 모양의 찻잔받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작은 나무토막에 시간의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곧은결의 잔잔한 무늬는 편안함으로, 옹이가 박힌 투박한 결은 나름 사연이 담긴 듯 아려서 더 고왔다. 한 포기 식물로 싹 틔우고 모진 풍상을 겪었을 회화나무, 그 숨결을 느낀다.

결이란 시간의 숙성이다. 한해살이 종자식물에도 결이 있으니 삼실로 짠 까실한 베와 목화꽃에서 얻은 면, 마에서 얻은 모시가 있다. 모시는 올의 굵기에 따라 부드러움이 다르다. 오죽하면 자식 키우는 사람과 세모시 키우는 사람한테는 막말을 못한다 했을까. 또한 동물과에 속하는 누에가 뽑은 명주를 비단이라 하는데, 누에의 기특함에 '결'까지 붙여 '비단결' 같다는 덤을 준 것은 아닐는지.

자연에도 결이 있다. 더운 여름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매서운 북풍, 험악한 비바람을 몰아오는 태풍 등, 그 바람결이 천차만별이다. 졸졸 흐르는 시냇가의 올망졸망한 물결을 보면 정답고 잔잔한 호수의 물결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마음이 갑갑할 때는 동해의 힘찬 파도를 보라. 그 늠름한 물결에 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찻잔받침 일곱 개, 차를 우려 찻잔을 올린다. 흙과 나무의 빛깔이 조화롭다. 찻잔받침을 건네준 분은 몸이 불편하다고 했다. 젊은 날부터 병원신세를 졌고 외아들은 시골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마음고생을 한 탓인지 말수가 적은 아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단다. 그분은 투병 중에 난을 키우며 목공예로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 와중에서 십여 년 동안 봉사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아름다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픔을 수반하지 않은 결은 단순할 뿐 그 깊이가 없다. 그 분의 마음결은 어떤 무늬로 채워져 있을까. 아린 상처는 짓물러 송진이 되고 그 통증이 굳어서 옹이가 박힌 관솔 같은 분은 아닐는지.

어느 연수원에서의 일이다. 찻방 상석을 차지한 찻상 좌탁 세 개가 서로 맞물려 다포에 다소곳이 덮여 있었다. 나무의 두께나 결을 보건데 몇 백 년의 나이를 먹음직하다. 기름을 잘 먹인 품새가 주인의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은 한 쪽을 가리키며 기백만 원짜리라고 설명을 한다. 그럼 좌탁 세 개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인 걸까. 그런데 같은 크기인데도 한 개는 몇 십만 원짜리라나? 나무의 크기가 아니라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그 가격이 어마하게 차이를 보인 것이다.

하기야 저 유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뇌를 보겠다고 줄을 서서 전시장을 찾아간 적도 있지 않았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뇌는 뭔가 다를 것이라며 잔뜩 기대를 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실험용 유리를 맞대어서, 종이보다 얇게 슬라이스하여 밀착한 흔적이 '뇌'의 일부라는 설명에 갑자기 초라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었다. 사람의 가치도 명성에 따라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를 두며 '돈벌이'를 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느 선에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따진다면 값어치가 미미한 쪽으로 기울겠지만, 누가 '인간의 가치'를 매길 수 있으랴. 그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다.

몇 백만 원이든, 몇 십만 원이든 그 비싼 좌탁은 나의 것이 아니니 관심 밖의 일이다. 단 조그마한 찻잔받침은 나의 소유다. 만들어 주신 분의 정성이 담겨있다. 볶은 들기름을 먹이면 냄새가 나니까 생들기름을 먹이던지, 아니면 간단하게 베이비오일을 바르면 나뭇결이 자연스럽게 살아난다고 한다. 인위적인 것을 싫어할까봐서 나무를 다듬지 않았다는 부연설명에 살뜰한 배려를 느꼈다. 보면 볼수록 정겨운 찻잔받침이다.

사람에게도 결이 있다.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고요한 숨결이나 세파에 찌들어 울근불근 화를 참지 못하는 거친 숨결이 있는가 하면, 마음씀씀이가 고운 프리미엄격의 마음결을 보면 존경심이 우러난다. 어찌 살아가는 데에 순풍에 돛을 단 날들만 있겠는가. 보기에 평탄해 보일 뿐 나름의 속사정도 헤아려 볼 일이다. 하지만 개중에 편안하고 나태함을 좇느라 진정한 삶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결핍'된 사람도 더러 있으니 이 또한 따지고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이 많다고 거드름을 피운다거나, 학식이 있다고 대접을 받으려 한다거나. 요리조리 눈치봐가며 손에 물방울만 튕긴다거나, 달콤한 입담으로 이웃을 매수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품격이 의심스럽다.

결은 한순간에 만들어지고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남을 시작으로 배움과 경험과 실패를 통해 한 켜 한 켜 만들어진다. 꽃잎이 화사한 봄날이라던가, 뙤약볕에 타들어가는 목마른 잎새의 갈증, 벌거벗은 꽃대의 몸부림, 제 살점 다 뜯어내는 혹독한 추위에 목구멍에 걸린 마른기침 쿨럭이는 날도 있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결은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대로, 까실하면 까실한 대로 순간마다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딱히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기준의 바로미터는 없으리라.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며 하나하나 선을 그어가는 자연의 '결'처럼, 나 역시 참한 마음결을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것도 지나친 욕심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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