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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모자 쓴 술잔 / 노정희

부흐고비 2020. 1. 19. 10:13

모자 쓴 술잔 / 노정희


동창모임에 출석률이 낮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茶) 한잔 마시러가자는 K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승용차는 댐을 지나 재에 오르자 도로를 벗어나 비포장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전국을 누비며 아리까리한 집에만 찾아다닌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창 꼭대기에, 더구나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 속의 통나무집 레스토랑까지 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주 익숙하게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폼이 한두 번 다녀간 것은 아닌 듯싶다.

K는 만날 때마다 서로가 누나니 오빠니 입씨름하면서 조크를 주고받는 친구이다. 상대방의 기를 꺾으려고 하다 보니 낯선 장소에서는 혹시 흠이 잡힐세라 신경을 예민하게 가동시킨다. 몇 명의 친구들이 밤경치 좋다며 감탄을 자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멋진 폭포를 구경시켜 준다기에 따라갔더니 조명을 비춘 그 폭포라는 곳이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형상화한 인공폭포였다. 개구리는 철없이 개골개골 울어대고 머쓱해서 하늘로 고개를 돌리니 웬 별들이 그리도 초롱초롱 내려다보는지. 말은 안 했지만 완전히 한방 먹은 셈이다.

‘두고 보자. 바가지나 왕창 씌워야지.’ 친구들한테 먹고 싶은 것 실컷 시키라며 큰소리 치고 메뉴판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K는 주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궁금해 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하더니 특별한 손님에게만 빌려주는 ‘모자 쓴 술잔’을 달라고 했단다.

“아, 예. 특별한 손님이구먼유. 진작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요.”

비아냥거림에 얼굴색이 변할 만도 한데 안면에 야릇한 미소를 띠운다. 주인은 무슨 보물인양 소중하게 K가 부탁한 술잔을 가져왔다. 그것을 본 순간 여자친구들은 일순간 경직되고 말았다. 레스토랑 주인은 목공예가로 손수 집을 지었고 현관 입구부터 줄 세워 놓은 야릇한 작품도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 ‘모자 쓴 술잔’ 이란 것이 너무나 정교해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모임을 위해 항상 수고하는 정희 친구께 먼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K는 능글거리며 술을 따르는데 그 술잔은 족히 일반 잔 못지않은 양을 담고 있었다. 동동주가 철철 넘치도록 따르고는 “받으시오.”한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KO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오기가 생겼다. 고맙다며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허연 동동주가 자꾸 흘러내리니까 아래쪽부터 빨아가면서 마시는 거란다. 옆에서 바라보는 남자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가시처럼 따갑게 귀를 찔렀다. 다음차례로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가 술잔을 받았는데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 다음은 미용실 하는 친구였다. 안 그래도 남자친구들의 농간에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염려를 하는 중인데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우와, 이거 울 신랑 것보다 더 실하다. 꼭꼭 주무르면 더 커지는 거니?”

이를 악물었는데도 웃음이 튀어 나왔다. 웃음이 그렇게 힘이 셀 줄이야, 눈물까지 질금거리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몇 잔의 술이 돌아가고 카페 한편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가 노래까지 부르며 의연한 척했지만 그날은 완전히 K에게 찍 소리 못하고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K는 내 목소리가 크다 싶으면 예전의 사건을 들먹이며 통쾌해 했다. 어떻게 되받아쳐서 복수할 방법은 없을까, K랑 가까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를 꼬드겼다.

“아무렴 혼자만 알고 있을게. 정보 주어서 고마워.”

느지막이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서 타지의 친구들이 대구로 모였다. 동창회 임시회의를 열어서 저녁식사를 하고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아갔다. 홍일점으로 무게를 갖추고 정숙하게 앉아 있는데 K는 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의기양양하게 ‘모자 쓴 술 잔’을 들먹인다.

“술잔을 받은 정희 표정을 보니까 가관이더라구.”

‘무어라, 너 오늘 잘 걸렸다.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기꺼이 철면피가 되리라.’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좌중을 휘 둘러보며, 아주 점잖게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받아쳤다.

“K야, 네 모자에는 보석장식까지 붙여서 리모델링했다며?”

귀를 쫑긋 세우고 K가 망신당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어차피 쏟아진 물이니까 할 수 없지 뭐. 적당한 선에서 손을 내밀어 구해주면 되겠지.’ 잠시 후,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공사비는 얼마나 들었느냐, 성능은 괜찮으냐, 공사 중에 통증은 없었느냐며 감탄과 부러움의 말들이 쏟아졌다. 웃음거리가 될 줄 알았는데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갔다.

아뿔싸,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이 동색인 것을 감안하지 못하다니. 이제 어쩐다? 저렇게 붕붕 뜨는 것을 보니 되레 날개까지 달아준 격이 되어 버린 셈이다.

K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말고 무시하면 되었을 것을, 순간의 감정이 앞서는 바람에 자세를 낮춰야 이긴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았다. 서로가 악의는 없다지만 상대를 이기려고 양보 없는 싸움을 한 것이다. 어쩌면 친구들 사이에서 우월하고 싶은 마음에 태클을 거는 상대의 기를 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정작 서로가 지키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이런 싸움이 과연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일까.

급하게 술 한잔을 마시고 바람 쐰다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울에 달아볼 것도 없이 전세는 기울었고 처참한 패잔병은 그제서야 의미 없는 일에 진을 뺀 것을 알고 씁쓸해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웬걸, 휘황한 불빛에 가려진 도시의 하늘에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 예전에는 별도 많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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