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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호롱불 / 노정희

부흐고비 2020. 1. 19. 10:15

호롱불 / 노정희


형광등 불빛이 흔들렸다. 두어 번 껌벅이더니 이내 어둠이 방안의 흔적을 지운다. 새벽녘이라 손을 쓰지도 못하고 억지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기억의 발자국을 떼었다. 한 발, 두 발….

갑자기 불빛이 살아났다. 콧김에 나풀거리는 불꼬리는 허공에 붓질하듯 섬세하고 날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꼭 다문 입술은 조각처럼 단단했고 자그마한 체구는 불빛의 음양을 받아 옹골차다. 새벽에 눈 뜨면 항상 그 모습의 어머니가 호롱불앞에 앉아 있었다. 자식들의 속옷을 벗겨 기슬(蟣虱)사냥을 하였다. 두 손톱을 맞대어 누르면 “톡”소리가 났다. 옷의 솔기인지, 아님 서캐인지 호롱불에 옷을 스치면 “지지직” 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갈랐다.

사냥이 끝난 옷은 이불 속에 넣어 덥혔다가 다시 입혀주는 어머니. 뒤꿈치 닳은 양말은 천을 덧대어 꿰매고, 뜯어진 옷의 솔기와 단추까지 꼼꼼하게 손을 보았다. 반짇고리를 살강에 올리고나면 아침 찬거리를 위해 함지박 가득 담아 온 감자를 깎았다. 사각사각 귀를 간질이는 소리, 뽀얀 감자속살은 모서리부터 색깔이 바랬다.

어머니의 밥상머리 교육은 엄했다. 뿔딸따리는(플라스틱 슬리퍼)마당을 걸을 때마다 질질 끌렸다. 발 치수보다 큰 신발을 신고 소리 나지 않게 사뿐히 걷기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어른 앞에서 맨발로 다녀도 안 되고, 어른보다 수저를 먼저 들거나 먼저 내려놓아서도 안 되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엄마였다.

엄마가 온전히 나의 편이 되는 시간은 잠자리였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만지고 젖꼭지를 배배 틀면서 손장난을 했다. 습관은 은연중에 행하는 몸의 언어다. 지금도 엄마를 마주할 때 웃옷을 들추어 젖을 만지고 젖꼭지를 당긴다. 늘어지고 쭈그러들었지만 아직도 젖꼭지는 손장난하기 그만이다.

어머니도 몸에 밴 습관은 그대로 삶의 방식이 되었다. 새벽녘에 돋보기를 끼고 앉아 콩이며 팥을 고르고 있다. 자식들에게 직접 일군 농사거리로 먹을거리를 챙겨 보내야 마음을 놓는다. 쌀이며, 메주며, 김장거리며, 하다못해 약초뿌리까지도 손수 장만하여 엑기스로 만들어 보낸다. 아직까지 자식 덕으로 살지 않겠다는 팔순 어머니는 정신 줄 놓기 전에 하는 말씀을 지켜달라고 하신다. 행여 당신 몸이 아프면 뒷산 어귀에 있는 요양원에 보내달란다. 동네 분들도 요양원에 있으니 심심치 않을 것이라며 자식들한테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단다.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한 어머니시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하지 않겠냐마는, 어머니의 자식사랑 농도는 유별날 정도로 각별했다. 어릴 때부터 엄하게 가르친 것은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란다. 당신 자식들은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신다.

호롱불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조용히 자신을 태웠다. 거친 삶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자식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등대를 지으셨다.

허기진 새벽이 길다. 나는 어둠속에서 천천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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