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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황혼 / 배형호

부흐고비 2020. 2. 10. 17:36

황혼 / 배형호
제18회 신라문학대상


돈 봉투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노란봉투에 공사대금을 넣어서 주었다. 돈을 세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냥 공손하게 받아왔다. 할머니가 세어서 건넨 돈을 할아버지가 받아서 다시 확인하고 넣어주는 돈을 또 셀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봉투속의 돈을 꺼내어 본다. 수표도 한 장 없이 지폐로 봉투 한 가득 든 돈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냄새가 난다. 숫자상 계산은 맞다. 그러나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돈의 모양을 보면 더 받아 온 것 같다.

동네에는 칠순을 넘긴 노부부가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저녁에 출근을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공장에서 야간 경비를 하고 아침이면 집으로 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자전거 짐받이는 빈종이 박스와 고물상에다 팔수 있는 물건을 한 자전거 가득 싣고 와 마당 한 곳에 모은다. 오늘도 할아버지는 기름걸레질로 반질반질 하게 닦은 자전거에 넘치도록 싣고 온 고물들을 내린다. 할머니는 건너다보이는 체육공원 옆 자리를 개간해서 채소를 심고 가꾼다. 할아버지 댁에서 며칠 동안 집수리를 하면서 본 풍경이다.

먼저 노후 된 배관 교체를 위해 수도관이 지나갈 자리에 놓인 가구와 장애물을 치운다. 주방 찬장 안에는 오래전에 사용하던 그릇들이 가득하다. 식탁에서 밀려난 그릇들이 예전에는 식구들이 많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찬장위에 얹혀있는 큰 솥과 냄비들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 식탁을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다. 찬장 안에서 멈춘 시간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는 빈 그릇을 깨워본다.

고물상 리어카를 몰고 온 할아버지는 모아두었던 종이와 고철 등을 고물상으로 실어 날랐다. 할아버지는 몇 장의 지폐로 그 동안의 수고를 보상받으며 무릎관절의 아픔도 잠시 잊을 것이다.

옥상 바닥 보수 공사와 물탱크를 철거하러 옥상으로 오른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밑 공간에는 삽, 괭이, 깔구리, 호미 등 잘 정비되어 걸려있는 농기구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땅을 향해 목을 빼고 있다. 볕 잘 드는 곳으로 보고 가지런히 놓인 많은 장독을 옮겨야 한다. 단지들의 뚜껑을 열며 크고 작은 단지마다 속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의 삶을 본다.

말린 산나물, 고사리, 콩, 소금, 간장, 된장. 그 중에서도 둘이 들어 옮기기도 버거운 된장독이 세 개나 되었다. 이 많은 된장을 두 분이 다 먹지는 못 할 것이다. 간장과 된장은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겠지.

단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빛 고운 된장을 보며 부모는 콩 같은 존재인가 싶다. 자기 몸을 다지고 다져서 간장을 주고도 된장으로 남아 남김없이 주고 가는 것이 부모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빨랫줄엔 색 바랜 할머니의 치마와 할아버지의 회색 바지가 꽃무늬 남방을 사이에 두고 햇살이 따사로운데 흔들리는 바람에 할머니 치마엔 꽃잎이 진다.

할머니는 가뭄이 들지 않고 잘 자란 채소를 아파트 입구에서 팔고 있다. 음료수를 그 돈으로 사 왔다. 나는 노란 오렌지 쥬스를 마시면서 할머니의 채소 맛을 느낀다.

마지막 날 할머니는 정리가 다 된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했다. 찬장 안에서 음식 냄새만 맡고 있던 그릇들은 음식이 그득히 담기고, 농사지은 채소와 옥상의 된장, 그리고 삼겹살을 구어 우리는 큰 스텐 그릇에 가득 담아 주는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거실 한 쪽으로 걸려있는 가족사진은 두 분의 젊은 시절을 붙잡아 두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세월은 흐른다. 흑백사진 속 자신에 찬 아버지와 어머니, 그 앞에 나란히 섰던 자식들은 사진 속을 나와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서 더 커진 가족사진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나란히 서있다. 사진 속 두 분은 인자하게 웃고 있는데 방안에서 가구를 정리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일은 다 마쳤다. 돈 봉투를 받았다. 봉투는 장롱 속에서 오랫동안 있었는지 좀약 냄새가 난다. 접고 접은 돈을 편 흔적에서 오랫동안 모아 온 돈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 이마의 깊은 주름살처럼 접힌 흔적에서 공장과 집을 오가며 거두어 온 고물을 팔아 모은 할아버지의 땀 냄새가 난다. 돈의 모서리가 구겨지고 접힌 부분은 바로 펴 본다. 할머니 손등의 잔주름처럼 펴진 돈에서 집과 채소밭을 바쁘게 다녔을 할머니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봉투속의 돈과 함께 따라온 두 분의 삶을 생각하면 더 받아 온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을 따뜻이 날 수 있게 해주고 기술과 돈을 바꾸어 왔는데도 마음은 개운하지 못하다.

이제 할머니가 소원하는 싱크대를 바꾸어 주기위해 할아버지는 어제처럼 저녁이면 출근을 할 것이다. 또 할머니는 채소밭에서 손으로 벌레를 잡고 김을 맬 것이다.

고령화 사회로 걱정들을 하지만 스스로 노후를 꾸려나가는 두 분을 보면서 집에서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젊어서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두 분이 신혼처럼 보이기도 해 웃음 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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