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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벽(擗) / 석민자

부흐고비 2020. 2. 10. 17:44

벽(擗) / 석민자
제17회 신라문학대상


처 저 정!

소나무가 생으로 꺾여지며 내는 소리다. 사시장철 푸르자니 속까지 꽉꽉 채울 여력이 모자랐든가 살풋살풋 내려앉는 눈발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양이 꼭 속이 빈 강정만 같고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가 꺾여져 내리다말고 엉거주춤하게 걸쳐진 모양세가 가관이다. 마른 나무도 아닌 청청하게 살아있는 나무가 생으로 찢겨져 나가는 소리는 겨울밤을 통째로 삼켜 버릴 듯이 하늘을 가르고 솔잎 하나만한 무게도 못되는 눈송이에 무너져 내리면서 몸을 비틀어댄 흔적은 자못 처절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바람을 동반한 눈이라면 올이 굵은 얼개미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것만큼이나 쉽게 흘러내릴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문제는 고요히 내리는 눈이다. 독야청청도 좋지만 뭐 할라고 사시장철 잎은 달고 있다가 이런 낭패를 당하는지. 온 산야의 잡목들이 겨울을 준비하느라 부지런히 몸피를 줄이는 동안도 저 홀로 청정함을 자랑하고 있다가 생으로 가지가 찢기고 꺾여 지는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보아 자만이 빚어낸 자업자득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전신주가 불어주는 휘파람 소리에서부터 풀피리 소리이듯 애끓게 이어지는 문풍지의 울음소리에 이르기까지 별의 별 소리들을 다 모아 합주를 해대는 게 겨울바람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산등성이를 쓸고 지나는 솔바람 소리만은 가을날 빈들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처럼 더불어 어우러지기를 거부한다. 격자문으로 비춰드는 달빛에 스며들던 솔바람 소리에선 늘 모가지를 늘이게 하는 서성거림 같은 것이 있었고 소녀 적 아직은 실루엣으로 남아있는 남자친구도 그 소리들은 몰래몰래 속닥거려줬고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지도 소근 소근 들려주고는 했었다.

“소나무는 움이 읎제. 어지간히 큰 놈도 중치를 꺾어 버리면 마 죽고 마는 게라. 밑둥꺼정 잘라내도 여상시레 움이 돋는 잡목들과는 비교가 안 되제.”

시집 간 고모가 죽고 고모부가 새 장가를 든 아내와 함께 인사를 다녀간 후 할머니께서 혼자 말이 듯 하시던 말씀이다. 그땐 그게 무슨 말씀인가 했는데 내가 그때의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한다. 움딸 열이 있은들 어디 시집 간 첫 해에 몸 풀다말고 꺾여 진 내 딸 하나에 비기겠는가.

쩌 저 저 저-윽

한 겨울밤에 얼어붙은 거랑물이 갈라터지는 소리다. 서리서리 감아 안은 한을 한 칼에 잘라내듯 기세가 서릿발 같다. 산골짝을 흘러내리는 물은 깡 추위가 올라치면 몇 번이고 다개가며 얼음을 얼궜고 한 겹씩 켜가 두터워 질 때마다 옥양목 찢어발기는 소리로 어둠을 갈랐다.

무릇 태어남은 깨트려지는 아픔이 있고서야 얻어지는 것. 빨래터에도 자고나면 또 새로운 얼음이 얼어있고는 했다. 양잿물에 삶은 옷가지들을 얼음장 위에 얹어두고 방망이로 몇 번 펑펑 두드려 대야만하게 뚫어놓은 물구멍에 대고 설렁설렁 흔들어 내는 걸로 빨래는 끝이었지만 고무장갑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하던 때라서 빨래를 하고 들어오는 어머니 두 손은 늘 발그레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눈 오는 밤 소나무 꺾여 지는 소리가 짐승 같은 거칠음을 내어뿜었다면 얼어붙은 거랑 물 갈라터지는 소리엔 소복한 여인의 서릿발 같은 절규가 서려 있었다.

밤에 들리는 소리들은 조금쯤은 무섭던가, 청승맞던가, 그런 느낌이 얼마간은 담겨있는 듯싶다. 초저녁달이 뜰 때를 즈음해서 삼이웃이 저렁저렁 울리는 큰 소리로 울어대던 부엉새는 어린 우리들에게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공포를 주던 대상이었다. 보석 모우는 습성이 사람과 같은 것 때문에 험한 벼랑에 둥지를 틀고 산다는 새. 그럼에도 욕심으로 눈 먼 인간이 그예 벼랑에까지 손을 뻗어가자 아예 두 눈을 빼앗아 경계를 삼게 했다는 새. 덩치도 둥우리만 해가지고는 아이도 너끈히 채여 안고 가버린다는 새. 소나무등걸 사이로 불그레한 달이 솟아오르고 그 음험한 소리로 부엉새가 우는 저녁이면 방안에 앉아서도 가슴 조이던 시절이 있었다.

접동새나 휘파람새의 울음소리는 무서움과는 또 다른 아릿한 아픔이 내제되어 있었던 듯싶다. 분명 당신께서도 젊어서는 며느리였으련만 시어머니들은 왜 하나 같이 며느리들을 죽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구박을 해댔을까. 서늘한 목소리로 한을 토해내듯 울어대는 접동새는 새파랗게 젊은 여인이 감나무에 목을 맨 모습을 떠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믐밤은 너무 깜깜해서 무서웠고 흡사히 귀신이 떠다니듯 그림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보름밤은 밝은 것 이상으로 만만치가 않았다.

‘솟따악 솟따악’

환청처럼 접동새 소리가 들려온다. 친정에 가있는 느낌이다. 하루아침에 뭉개져버린 터전. 인간들이 산허리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냈을 때 새들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날개를 폈다.

‘솟따악 솟따악’

풀이 죽은,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로 접동새가 흐느낀다.

어쩔 수없이 도회의 한 귀퉁이에다 고단한 날개를 접어내리기는 했어도 눈앞의 풍경은 늘 생경스러울 뿐 더불어 어우러지기에 두고 온 터전은 마냥 부리 끝에서 홰 울음으로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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