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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우리집 상어이야기 / 박청자

부흐고비 2020. 2. 10. 18:02

우리집 상어이야기 / 박청자
제16회 신라문학대상


상어를 두고 '시카고의 갱'이라 한다. 검은 등과 흰 뱃살, 날카로운 이빨과 지느러미. 세련된 몸매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내 세상인양 종횡무진 유영하는 모습은 가히 바다의 갱이라 불릴 만하다.

'영천 장 돔배기'라는 상어를 처음 본 것은 시집을 와서다. 시댁의 곳간에는 시래기 등 말린 채소들을 걸어두는 바람벽이 있었다. 돔배기는 새끼줄에 꿰인 채 그 곳 한 편에 매달려 있었다. 독 간으로 딱딱해 진 베개뭉치 같은 것을 본 순간, 맛보다는 생선의 외양이 더 궁금했다. 살덩어리일 뿐, 머리도 꼬리도 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푸줏간 주인이 쇠고기를 빗 듯 저며 와 쌀뜨물에 담근다. 그리곤 밥이 뜸들 때 함께 넣어 찐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어르신의 밥반찬으로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지 않다.

시누이를 시집보낼 때는 '두치'라고 하는 커다란 상어머리를 아예 통째로 샀었다. 푹 삶아 여골을 발라낸 후 삼베자루에 부어 굳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포항이나 경주의 잔치에 가 그 수육을 맛볼 때가 있다. 비리지 않고 담백한 것이 초고추장과 어울려, 육류와는 다른 맛으로 구미를 사로잡는다.

제사 째면 믿느니 상어다. 우선 요리가 쉽다. 알맞게 크기나 간을 챙겨주므로 용도에 맞추어 익히면 된다. 레몬즙이나 와인을 뿌려보지만 산뜻하기는 그대로가 나았다. 반석처럼 편편하다보니 괴기도 쉬워 얼마든지 동갤 수 있다. 산적만으로도 제상은 효성스러워 보인다. 경상도 이외에는 흔치않다보니 돌아가는 제군의 보퉁이에 두어 꽂이 넣고 보면, 푸진 인사도 듣는다.

제사상은 진설 후 점검시의 뿌듯함을 빼 놓을 수 없다. 빠진 게 없나 살피면서도 스스로가 흐뭇해지는 건 신이 와 고마움을 전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나를 불러놓고 앉음새를 꼿꼿이 하셨다. '찬 물 안 떠 놓을 바에는 이 정도는 괴야 하느니." 방바닥과 어머니의 손바닥 사이는 30센티쯤이었다. 사 후에도 지키고 싶은 당신의 자존심을 보며 나는 제사라는 글자를 무릎에다 수없이 쓰고 있었다. 입젯날, 지켜보시는 것처럼 제수의 높이에 신경이 가는 걸 보면, 위세는 여전히 내 어깨를 누르고 있나보다.

어느 해다. 잘 드시던 상어를 갑자기 피하셨다. 상에 올린 상어구이가 그대로였다. "이제 내 상에는 상어란 놈은 올리지 말거라. 원, 해녀를 해치지 않나, 아이 무서워." 어머니는 아기처럼 주먹을 쥐고 몸을 떠셨다. 동해안 방어진에 백상어가 나타났다는 거다. 뉴스를 들으셨단다. 나는 그 때, 상어의 출몰보다 어머니의 '아이 무서워'가 더 뉴스감이라 여겼다. 어머니가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머니는 최가에 반 곱슬머리, 그리고 옥니가 아니던가.

상어의 이빨도 옥니다. 백상아리는 삼각형의 톱날 같은 옥니로 물개나 바다사자를 갈기갈기 찢는다. 영화 '죠스'에 등장하던 무법자다. 그 위협적인 이빨 앞에서는 잠수부나 해녀도 당해낼 재주가 없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청상아리도 난폭함이 백상아리 못지않다. 그러나 우리가 즐겨먹는 악상어, 즉 악질은 사람을 공격한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달아나기 바쁘다. 익으면 줄어드는 준다리나 양지기의 배폭지는 악질 중에서도 맛과 씹히는 감촉을 일품으로 친다. 주로 그들을 고른다. 이 모든 것을 말씀드린다 해도 이해하실 것 같지 않았다.

상어를 어머니의 제사상에 올려오고 있다. 죽은 이도 부모니까 자식들이 잘 먹는 걸 보면 좋아하실테지, 그래서 눈감아 주실 것이란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 무서워'가 생각나 찜찜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산적을 올릴 때는 애써 영정의 시선을 피한다. 어쩌다 마주치면 때로는 꾸짖는 듯 하고 어떨 땐 빙긋이 웃으시는 듯 하다. 꾸짖는 모습일 때는 '내가 너를 시집 좀 살렸다고 이 것으로 복수하느냐"는 일갈이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다. 웃으시면 보통의 어머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내내 갈등을 남긴다.

상어는 인간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지만, 완벽한 물질을 만들어 내는 자연이므로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다. 간유로 스쿠알렌을, 껍질로는 가죽을, 이빨은 장식품이 돈다. 등과 가슴의 지느러미는 최고급의 비누, 또는 값비싼 요리재료인 샥스핀으로 거듭난다.

껍질로 샥스핀 스프 흉내를 낼 때가 있다. 껄끄러운 표면을 뜨거운 물로 벗겨낸 후 게살과 섞어 스프를 끓이면, 조각은 대서양 푸른 심해의 상어 떼로 솟구친다. 잘 푼 계란의 흰자위를 조용히 드리우면, 바다가까이에 내려앉은 흰 구름이 나를 이끈다. 마음 놓을 순간 없이 밀려오던 생의 파도들. 휴식도 없어 숨고만 싶던 일상을 깨고 나는 무한 속 저 광활한 자연의 품에 안겨 상어처럼 여행을 떠난다. 모처럼 온 몸의 기운을 싣고 박진감 있는 몸놀림으로 길고도 멀리, 그리고 산호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날은 단 잠을 자고 난 겨울아침처럼 밀린 책무가 오히려 고맙다 여겨지리.

남편은 그리 효자랄 수 없었다. 자상하지도 곰살궂지도 못했다. 이제야 철이 드는지 기일이 오면 유별난 구석이 보인다. 마중과 배웅부터가 그렇다. '귀신같이 찾아온다.'라는 말도 있는 만큼 그러지 말라 해도 막무가내다. 1층까지 내려가 엘리베이터로 모셔온다. 몸이 없는 혼령들이건만 그의 의식 속엔 몸이 있는 신들로 보이나 보다. 포옹한 듯 손잡은 듯 극진한 자세가 팬터마임을 보는 듯 하다.

작년부터는 축문순서를 아예 가정 사 보고시간으로 바꾸고는 "아버님, 어머님, 저 아무개올시다."로 시작해서 날씨이야기로 이어졌다. "밖이 쌀쌀합니다. 옷은 따뜻이 입고 오셨는지요" 비가 오면, "젖지나 않으셨는지요."다. 처음부터 웃음을 참느라 애쓰던 아랫동서는 이 때 쯤엔 입을 막고 기어이 밖으로 뛰쳐나간다. 겨우 작년부터 조용한 걸 보면 마침내 그 진지함에 감동을 받았나 보다. 배웅도 그렇다. 어깨를 감싸는 자세로 나가선 어디까지 갔다 오는지 한참만에야 들어온다.

부모에게 알뜰치 못한 이가 아내에겐들 살뜰했으랴. 물 맑아 놀기 좋다고 시냇물에 뛰어 든 개구쟁이처럼 대책 없다 여겨 질 때가 많았다. 그 물장구에 휘돌려 짓 누워버린 수초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감정은 믿을 게 못되어 그것으로 잣대를 잡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타인처럼 느껴지던 순간에 오던 고독은 삶을 얼마나 막막한 짐으로 만들던가. 그러나 제사 때의 그의 행동은 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정도의 순수로 내게 다가온다. 내가 흉내조차 내지 못할 믿음이 그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다. 그것은 너무 신선해서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졸렬하고 그는 아름답다.

어저께는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사신을 마친 후 두 분을 부축해 현관으로 향하던 그가 황급히 도로 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철상을 서두르던 모두가 의아해 하며 다시 엎드렸다. 담배와 커피를 잊어다는 거다. 부랴부랴 담배에 불을 댕겨 아버님 앞에 올리고 커피를 끓였다. 커피를 올리면서 영정을 보니, 어머니는 웃고 계셨다.

나는 상어의 진설을 놓고, 이젠 더 이상 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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