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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금 / 김원순

부흐고비 2020. 3. 11. 10:46

소금 / 김원순
2010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간수가 모조리 빠져나간 소금자루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언젠가 세면장 바닥을 바르고 남은 시멘트 포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처럼. 국산 천일염 100%라고 쓰인 붉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것이 소금자루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며가며 나는, 바윗덩이 같은 소금자루를 발로 툭툭 차거나 옆구리를 쿡쿡 쑤시곤 한다. 조금씩 부숴 놓아야지 배추나 생선을 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틈 하나 없이 엉겨붙은 소금들이 은근히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바닷물에 여태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소금처럼 한데 엉겨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 삶의 간수들이 나를 가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대했던 일이며, 남의 불행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일들이 모두 간수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나를 뒤돌아보기보다 남을 먼저 탓했으니, 내 삶의 간수는 얼마나 짜고 쓴 맛일까. 간수로 가득 찬 내 가슴은 텅빈 염전처럼 쓸쓸하기만 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소금자루는 부른 배를 더욱 내밀고선 마음껏 장난을 쳐보라고 한다. 나의 짓궂은 장난에도 싫은 내색이 없는 소금자루를 보고 있으면, 무심코 던진 남편의 말 한마디에 곧잘 상처를 입던 내 모습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소금자루처럼 간수를 버리고 나면 상처도 어느새 아물어 굳은살이 되는 것일까. 굳은살이 되지 못한 상처들이 내 몸 곳곳에 소금쩍처럼 피어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 세월의 강이 얼마나 더 흘러야 소금자루처럼 단단해질까.

소금자루를 풀고서 가만히 소금을 들여다본다. 소금도 놀랐는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 음습한 곳을 언제쯤이면 나갈 수 있느냐며 묻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나를 절여버릴 것만 같은 소금 한 알마다 열정과 맥박이 느껴진다. 어디라도 스며드는 소금을 따라 가보고 싶었다.

내 젖은 신발보다 낮은 곳에서 태어나 신발보다도 낮게 엎드린 채 살다가는 소금을 먹기가 왠지 망설여진다. 팍팍한 세상을 부드럽게 절여주기도 하고 알맞게 간도 맞춰 주다가 썩는 곳이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소금 같은 사람이 생각나서 일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서슴없이 해내는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묵묵히 떠받치며 소리없이 끌고가리란 생각이 든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나를 태우고서.

"소금이 바다의 눈물이라고 했지만. 요즘 들어 소금이 바다의 뼈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것은 마치 손발이 묶인 채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뼈만 남은 친정아버지 같아서 목이 메여온다."

음습한 내 움막집에서 세 번째의 겨울을 맞이하는 소금자루다. 그 지루하고 막막한 시간을 건너는 동안 몸 속에 쌓인 찌꺼기들을 남김없이 버리고 또 버렸다. 내가 미처 버리지 못한 자만이나 이기심 같은 것들도 미련없이 버렸을 것이다.

버릴수록 투명해지는 한 알의 소금이 되기 위하여 모진 땡볕과 해풍도 견뎠을 것이다. 거대한 빙산이 녹고 남해의 멸치 떼가 동해로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제 길을 묵묵히 걸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견뎠으며 사막화 되어가는 육지의 신음에 몇 번이나 귀 기울여 보았던가. 벽에 기대 선 소금자루가 거대한 바위산처럼 느껴졌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참 많은 소금을 먹었다. 내 몸 속엔 소금자루보다 많은 소금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수가 제대로 빠지지 않아서 장을 담거나 채소나 생선을 함부로 절이지 못하고 있다.

소금도 아니면서 소금인 채 살아온 내게 소금이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제 삶의 간수를 조금씩 버리며 살아가라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한 알의 투명한 소금이 될 것이라고. 그래, 소금이 되지 못하면 소금밭이라도 되어야지. 모진 땡볕이면 어떻고 거친 해풍이면 또 어떤가. 너무 쉽게 소금을 만나고 버렸던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는 소금은 오늘도 나를 끊임없이 절여주고 있었다.

간수란, 소금이 공기 가운데 습기를 머금고 있다가 녹으면 분리되는 짜고 쓴 맛이 아닌가. 두부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맛이기도 하다. 짜고 쓴 맛들이 그 무엇에게 소중한 맛이 되듯이, 내 삶의 간수도 누군가에게 귀한 맛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살면서 인생의 온갖 맛들을 보게 되는데, 간수처럼 짜고 쓴 맛들이 내 삶을 지탱해 준 것 같아서 지금도 가끔 그 맛이 그리워진다. 짜고 쓴 맛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겨선 안 될 일이다. 삶의 상처를 씻어내 새 살을 돋게하는 신비스럽고도 오묘한 맛이기 때문일까. 세상살이가 단맛만 있다면 삶이 얼마나 삭막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간수이기도 하다.

소금이 바다의 눈물이라고 했지만. 요즘 들어 소금이 바다의 뼈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몸의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버리고 난 뒤 남게 되는 하얀 결정체들. 그것은 마치 손발이 묶인 채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뼈만 남은 친정아버지 같아서 목이 메여온다.

그날 임종을 지켜보던 내게 앙상한 갈비뼈를 들썩이면서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던 아버지셨다. 드디어 한 많은 이승의 끝자락을 조용히 놓으신 아버지는 소금처럼 그렇게 떠나가셨다. 꽉 움켜잡으면 바스라질 것만 같던 아버지의 하얀 뼈를 안고 간수보다 진한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나는, 소금처럼 하얀 시트 위에서 자는 듯 누워 계신 아버지의 가늘고도 긴 하얀 뼈들이 내 삶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소금처럼 나를 끊임없이 절여주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제 아버지의 손과 발은 더 이상 묶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계실 것이다. 소금처럼 웃고 소금처럼 담담하던 아버지가 오늘 밤 내 꿈길을 찾아오실 것만 같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때로는 소금이 바다의 사리란 생각이 들곤 한다. '인생'이란 화두를 안고 살다가신 큰스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처럼, 내가 잠든 사이에도 '삶'이란 화두를 안고 고뇌하다 멍이 든 바다가 소리없이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그 사리들을 겁도 없이 먹으면서 내 속에도 저런 사리 하나쯤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염치없이 해본다.

꼭 장을 담지 않더라도 소금 한 자루쯤 곁에 두면 좋을 것이다. 흘러내리는 간수를 바라보면서 삶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팍팍했던 일상을 다지거나 설익은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절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질곡의 삶을 살다간 소금을 보며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어서다.

돌아오는 새 봄엔 꽁꽁 묶인 만삭의 소금자루를 풀어줄까 한다. 벌써부터 내년 장맛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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