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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겨울밤 세석에서 / 백남오

부흐고비 2020. 3. 13. 21:06

겨울밤 세석에서 / 백남오


여기는 세석평원입니다. 세석은 국립공원 지리산의 심장입니다. 나는 지리산의 모든 곳을 다 좋아하지만, 세석이 가장 좋습니다. 그 넓은 지리산 속의 유토피아를 생각할 때면 조건 없이 세석이 떠오릅니다. 이곳에 그 어떤 흔적이나 전설이 있어서만 아닙니다. 그저 오고 싶고, 오면 머물고 싶은 그런 곳입니다.

하늘이 유달리 높고,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는 것도 한 원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저 편한 친구처럼 만나고 싶고, 한없이 안기고 싶은 그런 곳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넓은 평원에만 들면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집니다. 아니, 멀리서, 이 특이한 고원의 평원을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립니다.

지금 제석 산장 안에 누워 있습니다. 음력으로 정해년 섣달 열엿샛날, 지리산의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자정은 이미 넘긴 시간입니다. 산장의 문틈으로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듯이 요란합니다. 산장에서 이렇게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것도 드문 일입니다. 바람소리 때문에 계속 누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봅니다.

그런데, 아니, 도대체, 무슨 이런 엄청난 일이 이어나고 있습니까. 성난 바람이 세석평원을 무차별 폭격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세석은 하얀 눈을 덮어쓴 채로 바람의 폭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온천지가 바람과 진눈깨비가 뒤섞여 격렬한 소용돌이를 치는 듯합니다.

문제는 달빛입니다. 그 천지개벽 같은 혼돈의 현장을 말릴 생각도 않은 채, 달빛은 교교하고도 무심하게, 바람의 횡포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달빛까지 함께 어우러진 세계, 이것이 천상인지, 지옥인지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제게는 아무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영하 20도의 세석평원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미지로 마음속에 새겨지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기 같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계산도, 이해타산도 없이, 가진 것 전부를 다 내어 주고도, 하얀 살을 드러낸 채, 생명까지도 맡겨 버린 채, 우주의 모든 고통을 받아드리는 장엄하고, 숭고한 세석의 모습입니다.

나도 순수이고 싶습니다. 저 겨울 세석고원을 닮고 싶습니다. 한때는 동화 같은 시절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너무 많은 때가 묻었습니다. 차별, 편애, 약육강식, 질투, 이기심, 꿈틀거리는 욕망들, 불의와의 타협,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가소롭게도, 그 모든 것을 비웠다고 강변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오만, 자만, 편협, 잔인성,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극한의 사악함 까지도 마음속에 요동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눈물이 나려합니다. 이 순간,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저 시린 세석처럼 살고 싶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산장 안에는 함께 한 L 시인이 기다립니다. 노 시인도 잠들지 못한 채, 그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나 봅니다. 안에서 절대 금지로 되어 있는 말하기의 금기를 깨고, 도란도란 애기를 나누다 잠이 듭니다. 평일과 눈 때문에 산장이 텅 비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나온 대성골이 너무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어제도 나는 교만했습니다. ‘대성마을’에서 일박 후 출발하면, 이곳 세석까지는 네다섯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일찍 도착하여, 영신봉의 낙조도 보고, 청학연못 까지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계곡, 비운의 계곡, 겨울 ‘대성골’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큰세개골’을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비탈이 앞을 가리고, 돌풍이 불고, 눈이 발길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세석 4키로를 남겨둔 작은 등성이부터는 빙판이 아예 절벽 수준이었습니다. 좁은 길에 눈이 무릎까지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발자국 씩 옮기는데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앞을 바라보니 영혼까지 압도하는 거대한 산비탈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불안감 말입니다. 상황이 어렵다보니 길에 대한 자신감마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만 믿고 묵묵히 따르는 일행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뒤돌아 하산을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잠시 후면 어둠이 닥칠 시간입니다. 비상사태를 맞이한 것입니다.

지리산은 참으로 엄중하고, 정밀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한 치의 양보를 하거나 사심이 없습니다. 지리산을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봐줄 수도 있지않느냐고, 항변해보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이곳 세석산장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대가로 바람과 눈과 교교한 달빛의 조화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남부능선을 타고, 청학동이나 쌍계사로 하산하려든 계획은 접습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적 없어 외롭고 더 찬란한 그 길의 서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 주능선 쪽 촛대봉으로 오릅니다. 하늘은 맑고 높습니다. 파란 겨울 하늘이 흰 눈과 어울려 절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일대의 조망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흰 눈을 소복이 뒤집어 쓴 천왕봉은 포근하고 친근한 이의 숨결로 다가 옵니다. 온 세상이 순백의 세계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얀 눈 속에 깊이깊이 묻힌 채, 조용히 엎드렸습니다. 시기와 증오, 미움과 욕망, 마음속 모든 악의 근원들도 이 순간만은 모두 사라집니다. 겨울 지리산은 순결이요, 여린 동심의 세계입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지는 상고대, 설화, 겹겹이 일렁이는 산마루의 황홀한 몸짓들. 나의 영혼을 이곳 지리 산정에 영원히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마음은 남겨둔 채, 몸은 또 다시 세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숙명적 한계일 것입니다. 그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이 다시 지칠 때, 나는 또 지리산을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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