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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거리에서 만난 여자 / 현진건

부흐고비 2020. 3. 13. 21:10

거리에서 만난 여자 / 현진건


동아일보 지상에<적도>를 연재하던 때에 당한 일이다.

하루는 신문사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고 종로 네거리를 지날때에 갑자기, "아이, 선생님!"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살펴보니 내 앞으로 오던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니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는 여자였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섰을 뿐이었다. 나는 이 여자가 혹시 불량녀가 아닌가도 생각하고 그의 모양을 살펴보았다. 노랑 구두에 붉은 치마! 검정 명주 두루마기! 여우 목도리! 수수한 양머리! 분도 바르지 않은 얼굴을 살펴보니 어떤 부잣집 귀부인같이 보이지 불량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 여자는 어떠한 여자일까.' 하고 나는 궁금해 했다. 혹시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소설의 애독자가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도 나의 소설 애독자라는 여자가 나의 집으로 나의 신문사로 많이 찾아 왔으니 이 여자도 그런 여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더욱이 요사이에 <적도>가 발표되자 나의 소설의 여자 팬들이 많이 찾아 왔으며 편지도 많이 왔으니 이 여자는 나의 팬일 것이리라고 직각直覺했다.

"아이, 선생님 얼마만이세요." 하고 그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 참 오래간만이외다."하고 나는 부지중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말씀드리기도 안되었으니 저리로 들어가시지요."
하고 그 여자는 대관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사양했으나 자꾸 들어가자고 조르기에 할 수 없이 들어갔다. 그 여자는 방 안에 들어가 앉자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선생님, 저는 여기서 선생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때 제가 그 약을 조금만 더 많이 먹었더라면 원산서 만난 것이 최후였을는지도 모르지요."
하고 그 여자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눈이 둥그래져서,
"실례지만 나는 당신을 잘 기억하지 못하겠는데요."
하고 그 여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나에게
,"아니, 선생님이 백 선생님이 아니세요?"한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오, 나는 현진건이란 사람이외다."
"네! 원산 계신 백 선생님이 아니세요?"
"아닙니다. 나는 원산 가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변이 있나!" 하고 그 여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도망치듯 신을 신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아마 백 모라는 사람이 나와 꼭 같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살면 별일이 다 생긴다고 웃고 말았다. <조선문단>, 19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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