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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은근과 끈기 / 조윤제

부흐고비 2020. 3. 23. 07:58

은근과 끈기 / 조윤제1


한국 문학과 한국사람 생활의 특질이란 어떤 것인가? 오랜 역사의 전통에서 살아 온 한국 사람의 생활에 특질이 없을 리 없고, 또 그를 표현한 한국 문학에 특질이 없을 수 없다. 


한국 예술을 흔히들 선(線)의 예술이라 하는데, 기와집 추녀 끝을 보나, 버선의 콧등을 보나, 분명히 선으로 이루어진 극치다. 또, 미인을 그려서 한 말에 '반달 같은 미인'이란 말이 있으니, 이도 또한 선과 선의 묘미일 뿐 아니라, 장구 소리가 가늘게 또 길게 끄는 것도 일종의 선의 예술일 시 분명하다.


그런데, 반달은 아직 충만하지 않은 데 여백이 있고, 장구 소리에는 여운이 있다. 이 여백과 여운은 그 본체의 미완성을 말함일지 모르나, 그러나 그대로 그것은 완성의 확실성을 약속하고, 또 잘리어 떨어지지 않는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나는 이것을 문학에 있어, 또 미에 있어 '은근'과 '끈기'라 말하고 싶다. 


춘향전은 고전 문학에 있어 걸작이라 평하고, 주인공 춘향은 절대 가인, 만고절색이라 한다. 그러나 춘향전은 어디가 좋은가? 춘향과 이 도령의 로맨스쯤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 그것만이 춘향전의 우수성이 될 리 없고, 또 춘향전이 가곡이라 했다, 그 외에도 얼마든지 좋은 가곡이 있어 하필 춘향전이 걸작 될 것 없는 것 같지마는,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좋고, 언제 어디서 몇 번을 보고 듣고 읽어도 좋다. 이것은 무엇인가? 곧, '은근'이다. 좋다는 점이 뚜렷이 그대로 노출되지 않고, 여백과 여운을 두고 있는 곳에 은근한 맛이 있어, 일상 보고 듣고 읽어도 끝이 오지 않는다. 더욱 춘향의 미에 이르러서는, 그 얼굴, 그 몸맵시 어디 하나 분명히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된 바 없고, 그저 '구름 사이에 솟아 있는 밝은 달 같고, 물속에 피어 있는 연꽃과 같다.' 하였지마는, 춘향전 전편을 통해서 보면, 춘향같이 예쁜 계집이 없고 아름다운 여자가 없다. 즉, 춘향은 둘도 없는 절대 가인이요, 만고절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곧 춘향의 미가 은근하게 무럭무럭 솟아올라와, 독자로 하여금 마음껏 그 상상에 맡겨, 이상적인 절대의 미경(美境)에 춘향을 끌고 가게 하기 때문이다. 


또, 고려 때 시가(詩歌)에,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 ​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쇼셔 


라는 이별가가 있다. 이 또 얼마나 은근한가? 그리운 임을 보내는 애끓는 정은 측정할 수 없고, 따라 그 애원, 호소, 연연(戀戀)의 정이 지극하지마는, 그것이 실로 은근하게 나타나 애이불비 하는 소위 '점잔'을 유지하면서, 문자 밖에 한없는 이별의 슬픔이 잠기어 있다.

​ 이렇게 은근하고 여운이 있는 정취는 저절로 끈기가 붙어 있는 것이니, 앞의 가시리 이별가에서 볼지라도, 그 그칠 줄 모르게 면면히 길게 또 가늘게 애처롭게 끄는 그것은 일종의 '끈기'라 아니 할 수 없다. 더욱이 정포은의 단심가(丹心歌),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신(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에 이르러서는 한국 문학의 끈기가 온통 그대로 표출되어 있는 감이 있다. 이러한 표현과 묘사는 우리 문학 작품에 있어 결코 희소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유산가(遊山歌)의 일절에,

​ 층암 절벽상(層巖絶壁上)에 폭포수는 콸콸, 수정렴(水晶廉) 드리운 듯,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솰솰, 열에 열 골 물이 한 데 합수(合水)하여 천방져 지방져, 소코라지고 평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부(巢父), 허유(許由) 문답(問答)하던 기산 영수(箕山穎水)가 이 아니냐.

​ 라 한 것이라든지, 또 사설시조에,

​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뫼에 메게 휘쫓긴 까토리 안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一千石) 실은 배에, 노도 일고 닻도 잃고 용총도 끊고 돛대도 꺾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치고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 만리 남고 사면(四面)이 거머어득 저문 천지 적막(天地寂寞) 가치놀 떠 있는데, 수적(水賊) 만난 도사공(都沙工)의 안과, 엊그제 여윈 내 안이야 얻다가 가홀하리요.

​ 라 한 것이라든지, 도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이 파란중첩하고 복잡기괴한 일생에서 모든 간난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 앤드로 끌어가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은 다 그러한 것이다.

​ '은근'과 '끈기', 이것은 확실히 한국 문학에 나타나는 현저한 한 모습일 것이다. 혼돈 광막(渾沌廣漠)한 것이 중국 문학의 특성이고, 유머러스한 것이 영국 문학의 특성이고, 담박 경쾌(淡泊輕快)한 것이 일본 문학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감히 이 '은근'과 '끈기'를 한국 문학의 특성이라 주장하고 싶다.

​ 우리 민족은 아시아 대룩의 동북 지방, 산 많고 들 적은 조그마한 반도에 자리 잡아, 끊임없는 대륙 민족의 중압을 받아 가면서 살아 나와서, 물질적 생활은 유족하지를 못하였고, 정신적 생활은 명랑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은근하고 끈기 있는 문학 예술 내지는 생활을 형성하여 왔다. 그것의 호불호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과거의 전통이었고, 또 반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 나왔고, 그렇게 살아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그러므로,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 은근하고 끈기 있게 사는 데 한국의 생활이 건설되어 가고, 또 거기서 참다운 한국의 예술, 문학이 생생하게 자라나갈 것이다.

  1. 趙潤濟는 국문학자. 본관 함안(咸安). 호 도남(陶南). 경북 예천(醴泉) 출생. 1929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졸업. 그 해 동대학 법문학부 조교가 되었다가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를 역임했다. 45년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에 취임하여 국립서울대학으로 개편하는 기틀을 닦았으며, 49년 서울대학 문리과대학 교수·학장 등을 역임했다. 54년 성균관대학으로 옮겨 교수·대학원장·부총장 등을 지냈다. 60년 한국교수협의회의장, 65년부터 영남대학 교수를 역임, 69년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학술원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 《한국시가의 연구》 《한국문학사》 《국문학개설》 등이 있고 편저로 《한글큰사전》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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