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섬돌 / 박양근

부흐고비 2020. 3. 27. 08:06

섬돌 / 박양근


별스럽지 않은 돌이다. 산이나 들판 웬만한 곳이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한 자 남짓 넓이의 돌덩이다. 주춧돌이 될 만한 모양새는 애당초 타고나지 못했고 솜씨 있는 석공의 마루와 마당 사이의 성긴 틈을 메우는 돌은 이것이 제격이다.

​ 이 돌이 섬돌이다. 집채를 오르내리도록 만든 평범한 돌층계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황토가 곱게 다져진 앞마당을 다소곳하게 내려다보듯 대청마루를 혼신의 힘으로 떠받치듯, 단단하게 괸 물상이다. 처음 그것이 놓여 질 때는 빈틈도 흔들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온갖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채석장의 파석처럼 부서져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지켜내는 미명의 아픔이 쌓이듯 박혀지는 곳이 섬돌이다.

​ 시골에서는 지금도 집안 어른이 섬돌을 오르내릴 때의 광경을 간혹 볼 수 있다. 어른이 나들이를 나서면 안주인은 쪽마루로 부리나케 달려와 신발코가 밖을 향하게 가지런히 놓는다. 비바람이 세찬 날이면 물수건으로 신발 속을 정갈하게 훔쳐낸다. 못이기는 체 신발을 신은 그 분이 댓돌 위에서 헛기침을 하면 눈치를 살피던 식솔이 마루에 몰려나와 인사를 올리고, 그제야 그 분은 집안을 휘휘 둘러보며 밖으로 나간다. 집안으로 들어 올 때면 외출할 때와는 반대의 순서가 빠뜨리지 않는다. 이처럼 엄숙하면서도 희한하게 펼쳐지는 시골 풍경은 초라한 섬돌이 뇌리에 박힌 나의 어린 시절의 일부였다. 당신의 섬돌이 짊어져야 할 몫이기도 했다.

​ 섬돌이 해야 할 노릇은 이것만이 아니다. 바깥손님에게는 방의 구실도 한다. 섬돌에 놓인 신발로써 가장이 집안에 있는지 혹은 귀한 손님이 찾아 왔는지 짐작한다. 낯선 신발들이 촘촘히 모여 있으면 손님치는 날이다. 늘 자리하던 신발이 며칠동안 보이지 않으면 가족 중의 누군가 먼길을 떠난 경우이다. 대청만큼 위세도 부리지 않고 부엌처럼 요란하지도 않으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먼저 챙기는 곳이 섬돌이다.

​ 햇살이 여유로운 날이면 섬돌 주변에는 모처럼 평안한 시간이 찾아든다. 골목을 뛰쳐나가려던 아이들도 제 차지가 된 섬돌 위에서 숨을 고른다. 빠뜨린 물건이 있을까. 누구를 찾아갈까. 무슨 놀이를 할까 궁리하는 아이의 이야기가 피어나면 섬돌은 오랜만에 귀를 열고 얼어 붙은 가슴을 녹인다. 그 아이가 훌쩍 자란 후에도 그냥 소일감이 된 이야기가 물레질이 되어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렇듯 섬돌의 속은 밀랍처럼 여리다.

​ 섬돌이 집안의 하루를 지켜보듯 섬돌을 지켜내는 일은 안주인의 차지이다. 맨발을 디뎌도 개의치 않을 만큼 그곳이 정갈해야 범접하기 어려운 집안이라 부른다. 쪽마루일지라도 섬돌 위에 신발이 가지런하면 도둑도 돌아선다고 한다. 섬돌 주변의 청소가 궂은일은 아니건만 집안 속 살림을 울타리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투정도 못할 당신의 업인가.

​ 무엇이든 세월을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생명이 없다 한들 섬돌인들 예외가 아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그나마 각을 이루던 모서리가 눈가의 주름살을 마냥 처져 내린다. 추녀에서 떨어지는 녹물이야 새벽마다 씻어낸들 자식 손자가 딛고 굴리고 내동댕이치는 신발자국은 메워지지 않을 골을 남긴다. 그 변화를 어찌 처연하다고만 할까. 아리다고만 할까.

​ 지금도 본가의 마당을 들어서면서 당신의 얼굴 너머로 섬돌을 본다. 하현달처럼 휘어지는 허리일 망정 언제라도 자식의 짐을 받아 안으려는 몸사위가 슬프건만 건성으로 웃으며 쪽마루 위를 올라서기 위해 섬돌에 발을 딛는다.

​ 순간,

​ 그 부분이 주변 가장자리보다 옴팍 얕아진 듯한 불안이 스쳐간다. 섬돌 아래로 떨어진 신발을 예전처럼 주워 올리는 얼굴마저 버려지듯 남겨지는 자식의 발자국으로 할퀴어 깎여진 겐가. 세파에 허우적거리는 자식의 신발을 가슴에 얹으며 그 무게로 닳아만 가는 섬돌.

​ 바람이 바위를 깎아 내린다. 풍우가 돌을 갈라지게 한다.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성긴 자국을 남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다. 하지만 발자국의 무게가 그 돌을 닳게 하고 바닥을 내려앉히는 줄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 자신의 몸맵시보다 섬돌에 정성을 기울이던 당신마저 세월을 탓할 뿐. 섬돌 바닥 위에 얹혀지는 신발의 희롱조차 침묵으로 삭혀낸다.

​ 요즈음 섬돌을 대신하는 가구는 신발장이다. 현관 입구에 좁다랗게 설치된 신발장에는 신지도 않는 신발들이 빼곡이 넣어진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신발 보관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현관 모퉁이에 비켜있는 신발장은 수시로 드나드는 발자국의 소리만 어둠 속에 갇혀 듣고 있을 뿐이다. 섬돌의 이야기도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그 의미만큼이나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이 신발장인들 나에게는 여전히 섬돌이다.

​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저녁에 들어서는 현관 출입구가 을씨년스럽다. 그럴 때면 심술을 부리는 발길질을 받아주던 섬돌을 떠올린다. 매끈한 바닥 한 군데 남아있지도 못하고 마지막 모서리마저 힘이 부친듯 주저 앉아버린들 나의 신발을 받아줄 섬돌이 가까이 있으면 한다. 걱정스러운 얼굴이 방문 밖으로 달려 나오고 팽개친 신발이 섬돌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지던 광경이 떠올려지는 날이면 더욱 고달픈 날이다.

​ 자식은 섬돌 위 그 얼굴을 디디며 자란다. 그래도 닳은 신발 한 켤레만 섬돌 곁에 오롯이 비켜있는 줄은 짐작하기 어렵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창北窓 / 오창익  (0) 2020.03.28
군산에 가면 / 김학  (0) 2020.03.27
은근과 끈기 (2) / 조윤제 ​  (0) 2020.03.23
은근과 끈기 / 조윤제  (0) 2020.03.23
손수건의 사상 / 조연현  (0) 2020.03.2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